나 이외에는 무관심한 일본인

정치와 변화에 무력증 불러

과거를 지우는 나라에 희망 없어

지난 15일 일본 중의원 선거는 아베 총리에게 압승을 안겨줬다. 아베의 우익질주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일본 시민들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파이낸셜타임스가 “인류의 진화”라고 칭찬한 그들이다. 그러나 일본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태도는 순종이거나 무관심이다. 정부의 우익본색이 부메랑이 돼 자신들을 해치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본의 정치는 가장에게 모든 것을 거는 가족과 같다. 가장은 가족들 사이에 상하관계와 규율을 세워주고, 누구도 소외되거나 굶어 죽지 않게 해 준다.

400년 전의 전국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결정은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즉 공(公)의 몫이다. 자민당 정치인들의 절반 이상이 세습의원이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의 직업의 세계가 있고, 국수가게의 주인은 국수가게 주인으로서의 세계가 있다. 대를 이어 맛있는 국수를 만들고 초밥을 만들면 상을 주고 명인으로 칭송해 준다.

일본에는 시위문화가 없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메이와쿠(迷惑ㆍ민폐)’를 싫어한다. 남을 만나면 잘못된 행동을 할까 만나기를 꺼려한다. 지하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혼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뿐 아니라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이성을 만나 데이트하는 것도 꺼려 출산율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 단체로 모여 국가와 공(公)의 일에 반대하고 시위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중의 하나다. 공(公)이 권장하는 마쯔리(축제)라면 무더위도 마다 않고 모두가 달려들지만, 사회문제로 인한 집단행동은 질서 있는 거리 행진이 전부다.

그게 싫으면 투표로 정치인들을 바꾸면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많은 국민들은 먹고 사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공(公)이 알아서 할 일이지 국민이 신경 쓸 영역이 아니다. 공(公)과 전통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만 관심을 표명할 뿐이다.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도 전체 유권자들 중 52.3%만 투표에 참가했다. 그 절반인 25%가 자민당을 지지했고 그것으로 75%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다. 집권여당의 의석이 1석 늘었다. 야당다운 야당이 없으니, 골수우익이 아니라면 기권하거나 자민당에 표를 줄 수 밖에 없다. 개헌에 대한 지지 여부에서도 정치권과 국민들 사이의 괴리는 크다. 국민들 사이에는 개헌 반대가 50%를 넘는다. 그러나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찬성이 80%를 넘는다. 6,600억원의 비용으로 소수만이 참가하는 하나마나 한 선거 결과를 근거로 “국민의 신임이다” “거대승리다”라고 떠들어도 국민들은 관심이 없다. 받아들일 뿐이다.

패전 후 10여 년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세대들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자신들을 압도하고 전후 세계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한 때 일본정치의 주요 세력이었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소멸해 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 자신들이 겪은 수난이 지배세력인 공(公)의 책임이라는 것도 잊혀져 갔다. 그 책임도 애초부터 외국인들만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나마 남아있던 역사와 기록들은 가르치지 않거나, 잘못됐다고 가르치거나 지워버린다. 그들에게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일 뿐이다.

일본에는 우리가 양심세력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문제에서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정책결정에 반영되기에는 공(公)의 벽, 메이와쿠의 벽, 그리고 선거의 벽이 너무 높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일본 국민의 몫이다. 보수적인 루터교 목사에서 반나치 운동으로 돌아선 마틴 니묄러의 글이 생각난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에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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