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Innovation)이란 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다. 그는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원동력을 찾았다. ‘창조적 파괴’가 그것이다. 1990년대 정보기술(IT) 혁명의 진전과 함께 창조적 파괴는 새롭게 주목 받았고, 슘페터의 혁신 이론은 경제를 넘어 사회 전 영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정치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보수정부도, 진보정부도 국가혁신을 내걸었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혁신을 모토로 삼았다. 당장 새정치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국민공감혁신위원회’로 명명했고, 새누리당도 보수 혁신을 주도할 당 혁신위원회의 출범을 알렸다. 2012년 경제민주화ㆍ복지국가와 함께 대선을 달군 말인 ‘새 정치’에 담긴 의미도 정치 혁신이었다. 정치 분야에도 혁신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혁신을 전방위적으로 내건 것은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추석 민심을 돌아봐도 ‘정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냉소적 발언이나 ‘이 참에 국회를 없애버리면 좋겠다’는 과격한 발언이 주를 이뤘다. 이런 분노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5개월이 가까워오는데 세월호특별법은 첫 단추조차 꿰지 못하고 있다. 올해 9월 현재까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8.3%에 불과하다. 정치의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게 민심의 중론이다. 갈팡질팡하는 새정치연합의 행보도 심히 딱하지만, 새누리당 역시 반사이익 이상의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혁신은 정말 불가피하다. 문제는 혁신이란 말이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혁신을 제대로 이루려면 기존 질서에 대한 ‘창조적 파괴’를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혁신을 반복하다 보니 새로움과 두려움을 안겨줘야 할 이 말이 그 반대로 뻔하고 낯익은 ‘관성적 대응’의 의미로 다가온다. 총ㆍ대선이나 당대표 선거 등 심판의 시간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비전ㆍ정책ㆍ조직혁신을 내건 비대위 또는 혁신위를 꾸리고, 적당한 시점을 골라 그럴싸한 혁신안을 발표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우리 정치의 풍경이다.

혁신을 하겠다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관성적 대응이 아니라 창조적 파괴를 하라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를 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혁신의 핵심은 사람을 바꾸는 데 있다. 사람은 그대로 놓아둔 채 제도만 바꿀 경우 혁신의 의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주요 리더들이 타고 있던 목마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목마에 오르는 ‘회전목마 정치’부터 바꾸지 않는 한 혁신은 국면 무마용 이벤트 정치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둘째, 스타일보다 콘텐츠가 중요하다. 이제까지 정당혁신과정을 보면 요란스러운 ‘깜짝쇼’의 형식적 스타일만 강조됐지 새로운 정책과 당내 민주주의 대안의 실질적 콘텐츠는 빈약했다.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보수 정책과 진보 정책을 넘나들며, 정당과 시민 간 소통과 공감의 생태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과감하고도 창의적인 대안을 내놔야 한다.

정치권이 입법과 갈등 해소라는 고유한 책임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내 이야기가 한가로운 담론이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맞다. 하지만 창조적 파괴를 하지 않는 한 우리 정치가 직면한 ‘대표성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지지해주고 싶어도 마땅한 정당이 없으니 아예 정치 없이 살아가겠다는 무당층의 증가로 상징되는 대표성의 위기는 우리 정치가 풀어야 할 가장 중대한 과제다. 특히 새정치연합은 바닥을 모르는 채 추락하는 지지율에서 볼 수 있듯이 대표성의 위기가 대단히 심각하다.

우리말 혁신(革新)이란 ‘가죽(革)을 바꿔 면모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가죽을 벗겨내는 아픔이 뒤따르는 게 혁신이다. 아픔을 동반하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선 혁신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기득권 포기든, 세대교체든, 네트워크정당이든, 아니면 과감히 해체하고 새롭게 창당하든, 제대로 된 창조적 파괴의 혁신을 보여주길 바란다. 정치에 대한 희망의 끈을 아직은 놓고 싶지 않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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