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사회부 기자

“전문이 벌써 삭제됐던데, 혹시 좀 보내줄 수 있나요.”

12일 점심 무렵 친한 판사들에게서 여러 통 전화가 걸려왔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45ㆍ사법연수원 25기) 부장판사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 재판장을 직접 비판한 글이 삭제된 지 한 시간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후 전문을 읽어본 판사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수위가 높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던데요.” “유사한 글들이 올라오지 않도록 대법원이 선제적으로 겁을 준 거밖에 더 되겠습니까.” “표현의 자유를 수호해야 할 사법부가 한다는 짓이… 창피합니다.”‘절대로 자신의 소속과 지위를 기사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꺼낸 그들의 한탄은 닫힌 조직에 대한 깊은 실망과 닿아있었다. (김동진 부장판사의 글 ▶ 전문보기)

판사들의 한탄에는 이유가 분명하다. 우선 사법부 내에서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판결에 대한 아쉬움과 의구심이 넓게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개입이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는 판결에 대해 “선거개입과 관련 없는 정치개입은 뭔가”라며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김 부장의 비판에 대한 공감대가 크다. 또 내용과 상관없이 조직에 쓴 소리를 하는 문화마저 차단시키는 대법원의 고압적인 태도도 문제다. 실제로 김 부장의 글이 삭제된 뒤 부산지법 성금석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게시판에 대법원의 일방적인 글 삭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올렸고, 법원 공무원들도 “이러니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취지의 댓글을 달며 대법원의 일방적 행정조치에 반발했다.

대법원의 전문 삭제와 징계 검토를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김 부장의 글은 ‘사법부 전산망 그룹웨어 운영지침’ 중 ‘타인 명예훼손, 정치적 중립성 침해내용, 게시판 개설 목적 비부합’ 조항 등에 위배될 여지가 있다. 실제 글 내용 중 정권 비판과 사건 재판장이었던 이범균 부장판사에 대한 사적인 품평은 ‘정치중립 의무’를 져버리고 명예훼손 소지도 있다. 이에 대해 “판사답게 판례 등으로 비판했으면 더 나았을 것”등의 반응도 나왔다.

대선·정치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를 마친 후 취재진을 피해 법원을 나서던 중 인터뷰를 요구하는 기자들과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는 이날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연합뉴스

그렇지만 대법원이 김 부장에 대한 징계를 끝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사건을 종결하는 것은 반대한다. 이번 판결은 갈수록 상식과 법치주의에서 멀어지고 있는, 권력을 위한 사법부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어쩌면 김 부장은 징계를 각오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김 부장의 글은 사법부 전산망 운영지침은 위반했을지언정, 지금 시대의 ‘상식’과 ‘법치’를 대변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사법부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제2의 ‘김 부장’을 또 다시 징계해야 하는 악순환만 반복할 것이다.

이 기회에 사법부가 내부 구성원들의 표현 자유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취임 이후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만, 판결에 대한 건전한 내부 비판과 국민의 비판 여론을 진정성을 가지고 들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은 부족하다.

김 부장이 문제의 글을 쓴 이유라 밝힌 ‘판사에게 주어진 법치주의 수호 의무’는 이제 사법부의 화두가 돼야 한다. 사법부의 올바른 집단 이성이 제대로 작동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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