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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판사가 나라를 잡는다?

입력
2014.09.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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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이 꼽은 ‘연수생 필독서 10권’에 든 지혜의 아홉 기둥(원제 The Brethren)은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기자 밥 우드워드가 미국 연방대법원 비사를 다룬 책이다. 역자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 중반 두 권으로 펴낸 초판 제목을 판사가 나라를 잡는다 판사가 나라를 살린다로 달았다. “잘못된 판결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잘못을 바로잡는 판결로 나라를 살릴 수도” 있는 대법원(관)의 위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1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을 접하고 20년 묵은 이 책 제목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판사가 나라를 잡는(망치는)구나!”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의 조직적인 여론조작 활동이 ‘불법 정치관여’이긴 하나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궤변도 황당하지만, 정치관여 행위를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그 죄책이 무겁다”고 꾸짖으면서도, 이런저런 감경 사유를 붙여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권력기관의 교묘한 선거개입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이 판결이 권력의 유혹에 한없이 약한 공직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204쪽에 달하는 장문의 판결문을 형광펜, 빨간펜으로 밑줄 팍팍 그어가며 꼼꼼히 읽었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피고인 측이 제기한 수사 및 증거수집의 위법성 여부,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대한 설명이 장황할 뿐 사건의 실체에 대한 판단 부분은 오히려 간결하고 명쾌하다. 재판장인 이범균 부장판사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정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판결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재판부를 인신공격하는 행위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법원 내부통신망에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한탄하는 글을 올린 한 부장판사처럼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앞두고 입신영달에 중점을 둔 ‘사심’ 가득한 판결”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법’은 매우 기계적으로 적용됐고 ‘양심’은 매우 편리한 방식으로 작동한 판결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합리적 의심’이 꼬리를 물고 커져간다.

특히 이른바 ‘원장님 지시말씀’에 “직접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시한 부분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선거법 위반 무죄의 주요 근거로 든 재판부의 순진무구함에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누가 불법이 명백한 지시를 공식 기록으로 남기겠는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직접 지시’에 집착한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2010년부터 대선 직전까지 수시로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확실한 싸움’을 독려한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어떻게 해서든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하고…”(2012년 2월 17일 지시말씀) 등 민주당을 대놓고 북한과 연계한 종북좌파로 몰아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선거개입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선거개입인가. 이 밖에도 판결문에는 개별 쟁점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오락가락해 서로 상충하는 부분들이 수두룩하다.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갖다 붙인 감경 사유들도 어처구니가 없다. 대표적인 것이 “원 전 원장이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오인했을 뿐 적극적으로 위법성을 인식하고 범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대목이다. 제 임무조차 몰랐던 한심한 사람이 4년씩이나 정보기관장으로 국가안보의 한 축을 담당했다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과문한 탓인지 ‘법을 몰랐다’는 변명을 주된 감경 사유로 인정한 판결은 들어보지 못했다. 반성은커녕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피고인에게 재판부가 알아서 아량을 베푼 것도 전례 없다. ‘입신영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선거개입을 유죄로 인정하거나 실형을 선고할 경우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시비 등 정치적 파장이 일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이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이미 여러 사건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터에 이대로 물러설 상황은 아니다. 항소심과 대법원 최종심까지 지루한 법정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나든 법원은 이번 판결로 권위의 기반인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 ‘법치주의가 죽었다’는 말이 괜한 한탄이 아니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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