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기나 체스 게임에서 상대편 말의 공격을 받아 옴쭉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외통수에서도 노련하게 빠져 나오는 ‘신의 한수’는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의 내년 시행 입장을 최근 암묵적으로 밝힌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그런 노련함을 보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배출권 할당위원회의 수장인 최 부총리에게 배출권거래제는 외통수나 다름 없었습니다. 지난 정권에서 만들어진 ‘온실가스배출권의할당및거래에관한법률’은 내년 1월 1일부터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개정해 시행을 미루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재계 반발은 거셌습니다. 최 부총리 입장에선 시행하지 않는다고 하면 ‘법을 무시한다’는 비판이, 시행한다고 하면 제계의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쏠릴 것이 뻔한 상황. 경기부양이란 목표를 향해 갈 길 바쁜 최 부총리로서는 곤혹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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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최 부총리는 국회나 언론으로부터 배출권거래제 시행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부정적 입장을 밝히면서도 시행 여부는 딱 잘라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기획재정부 관료들도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 결과 재계의 반발은 최 부총리를 비껴갔고, 시민단체나 야당의 비판도 적었습니다.

그리고 최 부총리는 경제정책방향 발표, 세법개정, 서비스업 활성화 대책 등 굵직한 과제들을 배출권거래제 논란에 발목 잡히는 일 없이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습니다. 최 부총리의 배출권거래제 시행 입장이 서비스업 활성화 대책 발표 직후 흘러나온 건 외통수를 피해가는 절묘한 한 수였다는 평가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분위기까지 풍겨 재계 반발을 어느 정도 잠재웠을 뿐 아니라 시행 강도를 대폭 낮출 명분도 쌓았습니다.

결국 윈-윈(win-win) 아니냐고요? 배출권거래제 주무부처인 환경부 입장에선 아닐 것 같습니다. 최 부총리가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법에 정해진 할당계획 수립을 미뤄 전체 일정이 어그러진 탓에 환경부는 향후 제도 시행에서 동력을 상당 부분 잃을 것으로 보입니다. 엄연한 법적 절차를 정부가 제대로 지키지 않은 만큼 향후 배출권거래제를 반대하는 기업들이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낼 가능성도 있습니다. ‘왕 말’이 외통수를 피한 대신 옆에 있던 다른 말이 유탄을 맞은 모양새입니다. 내년 시행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 만큼 이제라도 정부 부처들이 통일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종=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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