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새 정치'는 낡디 낡은 용어다. 전두환조차 집권 초 민주주의원칙에 바탕한 새 정치를 역설했다. "다양한 의견과 이해의 상충을 조화시켜 국민 동질성을 증진하겠다"고. 물론 방점은 '동질성'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새 정치는 분열을 용납치 않는 국론통일이었다.

이후 매 정권교체기마다 새 정치는 반(反)부패, 민생중시, 화합정치 등 좋은 건 다 포괄하는 수사(修辭)가 됐다. 새 정치가 그나마 실체감을 얻은 건 노무현정부 때일 것이다. 그의 새 정치는 "국민이 주인인 정치"이자 "대결과 갈등이 아닌 대화와 타협으로 푸는 정치"였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에 도리어 증폭된 대결과 갈등에 많은 국민이 등 돌림으로써 허언(虛言)이 됐다.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다들 이 낡은 구호를 왠지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구체적 현실감이 와 닿은 때문이었다. 시작은 안철수였다. 임계점에 다다른 기성정치 혐오가 백면(白面)의 그를 유력 대선주자로 만들었고, 실제로 지난 서울시장선거에선 새로운 방식의 정치행위가 가능할 수 있음이 입증됐다.

여야 후보들도 새 정치의 다른 버전인 쇄신과 개혁을 내걸었다. 누구든 변화하지 못하면 감히 선택을 바랄 수 없게 됐고, 일자리 경제성장 복지증진 안보 등 모든 국가현안이 새 정치의 하위변수가 됐다. 박근혜, 문재인에 이어 마침내 안철수의 대선합류로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지 겨우 한달 만이다. 당초 새 정치의 외피는 기존 정당정치의 혁신이었고, 내용은 민의를 담아내지 못하는 낡은 정치구조ㆍ행태ㆍ인물의 청산과 불공정한 기득권구조의 재편이었다. 지난해부터의 도도한 흐름대로라면 대선이 벌써 중반에 접어든 이 즈음엔 여기저기서 희망의 싹들이 자라고 있어야 했다. 헌데 싹이 틀 조짐도 없다.

이런저런 정책실패, 비리와 결함으로 오래 전 무대에서 사라졌던 이들이 후보들의 멘토로 화려하게 부활해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고 나서고, 도저히 새 정치에 묶일 수 없는 예전 각기 다른 정파의 인물들이 국민통합을 부르짖으며 몰려나왔다. 청정기를 돌려도 모자랄 판에 악취 풍기는 관 뚜껑이 도처에서 열렸다. 신념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철새들도 다시 제 철을 만났다. 가치가 아니라, 이해와 득실만을 정치행위의 동기로 삼는 가장 질 나쁜 형태의 구태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사람 뿐이랴. 그 얼굴이 또 그 얼굴이니 다투는 양상도 예전과 다를 리 없다. 검증을 빙자한 막무가내식 폭로, 거짓말, 비방의 이전투구에다 요즘의 툭 던져놓고는 "알아서 해명해보라"는 식의 NLL 문제, 뻔한 인연에도 본질을 피해가는 부일장학회 논쟁들도 그런 것이다. 의지만 있으면 간단한 해결방식이 있는데도 서로 짜증나는 요설로 시간 끌며 정치적 효과나 키우는 행태는 여야 어느 쪽이랄 것도 없다. "과거 아닌 미래를 얘기하자"던 박근혜, 문재인 모두 태생조건에 갇혔다.

정작 새 정치의 핵심이었던 기존 정치ㆍ정당구조 개혁은 이런 복고조(調)에서 깨끗이 실종됐다. 어느새 박근혜의 새 정치는 '약속 지키는 것', 문재인의 새 정치는 '일자리 만드는 것'으로 작고 초라해졌다. 안철수는 출마선언 때 단일화 조건으로 내건 '정치권의 변화와 개혁'책임을 온전히 문재인에게 떠안긴 그 상태 그대로에 머물러 있다. 후보들의 동선도 부지런히 시장, 행사장이나 돌며 악수와 덕담이나 주고받는 예전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얼마 안 남은 기간에, 급박한 혼전판세로 보아 앞으로 대선국면은 자잘한 이슈들을 잡고 벌이는 미세한 정치공학적 계가(計家)양상으로나 흐를 가능성이 높다. 지금껏 나오지 않은 새 정치의 큰 그림을 이제 와 새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결국 정치변화의 시대적 열망을 담지 못함으로써 이번 대선의 의미도 크게 퇴색됐다.

새 정치가 아니라 그나마 덜 나쁜 정치를 할 인물을 골라야 하는 유권자들의 고민도 예전 마찬가지가 됐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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