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8일 대법원은 세상사람들의 예상과 기대와 어긋나는 판결을 내 놓았다. '한국판 OJ 심슨 사건'으로 알려졌던 '만삭 의사 부인 사망 사건' 상고심에서였다. 1심과 2심이 남편인 의사에게 '살해'를 인정, 징역 20년을 선고했는데, 대법원은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고 치밀한 논증이 없다며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세상사람들은 그냥 "아, 대법원은 남편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구나"는 생각을 했다.

앞서 6월 22일 서울행정법원은 세상사람들의 감정과 정서를 거스르는 판결을 내 놓았다. 힘겹게 꾸려가는 재래시장이나 동네슈퍼를 죽이고 있는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에 대해 구청이 주말ㆍ야간 영업을 금지하는 조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위법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그냥 "아, 법원에서 대형마트가 주말ㆍ야간 영업을 해도 된다고 판결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세상사람들의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고, 감정과 정서를 거스르는 결정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년 넘게 판사를 하다가 변호사로 전업한 지인을 만났다. 판결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여러 경우가 있지만, 세상사람들의 기대와 정서에 반하는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 역시 많이 힘들다고 했다. "정확한, 그러나 복잡한 법 논리를 세상사람들은 따지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이래야 한다거나 혹 저러면 안 된다는 식의 인식이 평가의 중요한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만삭 의사 부인 사건의 경우 억울하게 살해된 것이 분명한데 왜 법원이 남편의 편을 드느냐는 세상사람들의 불만이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대형마트 문제도 법원이 왜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 편을 들지 않고 대기업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느냐고 힐난하는 모습을 예상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판결 내용을 수긍할 수 있다. 만삭 의사 부인 사건의 경우, 제시된 증거들만으로는 남편이 부인을 살해했다는 필요충분적 조건에 미흡하니 검찰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 오라는 내용이다. 대형마트 문제는 조례제정이 일방적이고 사전에 통지를 하지 않아 위법이니 절차를 잘 지켜 다시 조례를 내놓으라는 주문이다. 그 결과 만삭 의사 부인 사건은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의 재판(再版)처럼 미제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없지 않게 됐다. 대형마트 문제는 해당 구청들이 조례를 새로 만드는 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 한동안 유야무야 될 형편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세상사람들의 기대와 정서에 어긋나는 '불편한 현실'을 맞게 됐는데, 법관이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 때 대법관 후보에 올랐던 그 변호사에게 그렇다면 '법관의 양심'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판사는 법이라는 벤치(자리)에 앉혀진 사람, 한쪽으론 벤치 바깥의 힘과 권위에 굴하지 않는 판단, 한쪽으론 포퓰리즘에 빠져 인민재판 식으로 흐르지 않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세상사람 마음으로는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독재와 권위가 지배하던 상황에서 정치적 판결은 물론 '사법 살인'까지 기억하고 있는 세상사람들은 '법관의 양심'이란 국민의 기대와 정서에 부합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앞서 두 사례는 '법관의 양심'에 어긋난다는 시각도 있었고, 특히 누리꾼을 중심으로 판결을 비방하는 반응들이 적지 않았다.

'법의 벤치'에 앉혀진 판사들이 정치권과 권력층의 눈치와 압력에서 양심을 지키는 일이 당연한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못지 않게 중요한 양심은 세상사람들의 여론과 주장으로부터 또한 독립하여 견고하게 '법의 벤치'를 지키는 일이다. 한 사건은 '한국판 OJ 심슨 사건'으로 흐를 가능성이 작지 않고, 한 문제는 당장 공평사회 구현에 역행하는 상황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판결 내용은 법관의 양심, 법의 벤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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