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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두번 우는 노인들/ "집에서 소외받고 경로당선 왕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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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두번 우는 노인들/ "집에서 소외받고 경로당선 왕따"

입력
2010.06.0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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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84)씨는 얼마 전 서울 종로구의 한 경로당에 머물렀다. 함께 지내는 아들 내외가 해외여행을 가면서 집 열쇠를 안주고 갔기 때문. 이씨는 경로당에서 밥을 먹고 잠도 잤다. 일주일 뒤 경로당 회원들은 밤중에 이씨를 내쫓았다. "자식까지 있는 멀쩡한 노인네가 뭐 하러 여기서 먹고 자느냐"는 것이었다. 갈 곳 없는 이씨가 간간이 경로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목격됐지만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김모(69ㆍ서울 강남구 논현동)씨는 월 소득 20만원으로 혼자 산다. 출가한 자식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김씨는 집 근처 구립경로당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경로당 회원들의 텃세가 심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식판을 들고 앉으려면 회원들이 '자리 있다'고 눈치를 줘서 맨 끝자리에서 후다닥 먹고 나온다"고 했다. 심지어 밖으로 내쫓겨 식사를 할 때도 있었다.

'왕따'가 이제 어린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들이 가정에서 소외되고 학대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래 집단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심한 경우 물리적 학대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노인 왕따가 주로 발생하는 곳은 역시 경로당이다. 구립경로당의 경우 형식상으로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다른 지역 거주 노인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저소득층 노인은 차별당하기 일쑤다. 일부 경로당은 2,000~4,000원의 월회비를 임의로 정해놓고 회비를 내지 못하는 노인들은 접근조차 불허하고 있다.

구립경로당의 경우 기초생활수급자는 구청에서 무료로 도시락이 제공되거나 구청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무료로 점심을 먹을 수 있지만, 그 외의 노인들은 점심값을 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인들의 경제적 처지가 그대로 드러나고, 이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에 대한 왕따로 이어진다. 경로당 시설과 운영비, 식사 등은 구청에서 대부분 제공하는데도, 관리나 운영을 노인들이 직접 하면서 힘없는 노인들을 박대하는 것이다. 1일 서울 역삼동의 한 경로당에서 만난 김모(76)씨는 "경로당에서 밥을 같이 먹으면 좋겠지만 기초생활수급자라 도시락이 집으로 배달돼 그냥 점심때는 집에 가서 혼자 먹는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어도 가족의 부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인들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끼당 2,000원 하는 식비가 부담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원봉사를 하는 전모(42)씨는 "경로당 내에서도 은근히 재력이나 차림새 등으로 차별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수급자로 지정이 안된 분들 중에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맘 편히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인근의 대규모 아파트단지. 단지마다 경로당이 따로 있다. 회원수가 20~30명인 이곳은 구립경로당에 비해 깨끗하고 공간도 널찍했다. 점심도 무료로 주고 별다른 출입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근 저소득층 노인들에겐 언감생심이다. 아파트 주민이냐 아니냐가 무언의 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로당에서 만난 정모(68)씨는 "가끔 처음 보는 양반들이 오기는 하지만, 분위기도 낯설고 이야깃거리도 없어 한 번 오고 난 뒤로는 잘 안 온다"고 했다. 하지만 구립경로당을 이용하는 한 노인은 "아파트 내 경로당에 가면 말도 안 걸고 부엌에도 못 들어가게 하는 등 불편해서 못 가겠더라"고 토로했다. 돌아가면서 점심을 대접하는 관행도 형편이 안 되는 노인들에게는 부담이다. 한 노인은 "얻어먹기만 하고 안 사면 철면피라고 다들 싫어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노인학대 행위자 10명 중 3명 이상은 노인이었다. 전반적으로 수명이 늘면서 늙은 자녀가 부모를 학대하는 사례가 많지만, 경로당 등 사회시설 내부에서 일어나는 노인끼리의 학대도 꾸준히 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노인학대 중에는 언어와 정서적 폭력으로 인한 피해, 즉 왕따 행위가 40% 이상을 차지해, 신체적인 폭력(22%)보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구노인정보센터 이선자 소장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노인들이 또래집단에서마저 차별을 받고 있다"며 "노인은 무능력하다는 사회적 인식과 늘어난 고령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태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라고 진단했다. 15일은 세계노인학대 인식의 날이다.

강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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