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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최후의 항일 투쟁 건국동맹·독립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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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최후의 항일 투쟁 건국동맹·독립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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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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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여운형은 서울에서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이때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지 9년째 되는 해였으며 일제의 물자 인력 수탈과 조선민족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이런 중에 민중은 운명을 저주하거나 정감록만 찾고 있었고 왕년의 용감한 독립투사들조차 일제에 구금되었거나 운동을 중지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건국동맹의 조직과정 및 활동은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가 46년에 저술한 「여운형선생 투쟁사」에 잘 나온다. 이 저서에 따르면 건국동맹은 건립된 지 두 달 후인 1944년 10월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 연합국과의 연대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 등을 핵심으로 하는 강령을 제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달 건국동맹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내무, 외무, 재무 등 부서를 정하고 각 도 대표 책임위원을 선정했다. 아울러 건국동맹은 1944년 10월 8일 경기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출범시켰으며 45년 3월께는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군대를 건립할 목적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건국동맹은 특히 화북조선독립동맹과의 연락 및 연계를 구축하는데 노력했다. 독립동맹은 1942년 7월 중국 화북 태항산에서 건립됐는데 산하에 무장부대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1944년 8월 당시 조선의용군 주력은 중공의 수도 연안으로 이동하였으나 무정 김창만, 이유민 등 독립동맹의 핵심 인물들은 베이징(北京)에서 가까운 태항산에 있으면서 베이징, 톈진(天津) 등 화북 도시와 발해 연안의 조선인 농장 그리고 만주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독립동맹 지부를 확대하고 있었다.

독립동맹과의 연계는 성공했다. 이만규에 따르면 1944년 12월 무정의 연락원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건국동맹원 이영선, 이상백과 여러 차례 회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아울러 이때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은 확고히 연계하기로 맹약했다고 한다. 그 후 45년 4월 말 여운형은 박승환을 연안에 파견하여 조선의용군과의 협동작전을 모색했고 5월에는 함북 종성 최주봉에게 독립동맹 동지들이 국경을 넘어 입국할 때 숙소와 연락처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또 6월에는 독립동맹의 요청에 응하여 연안에서 열릴 국치기념대회(8월 29일)에 참가할 대표를 파견했다. 한편 45년 5월 무렵 여운형은 한때 중국으로 망명하려다가 포기했다. 그가 가려던 곳은 태항산이나 연안이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만규 저서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건국동맹의 상은 대개 이 저서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건국동맹의 실체 및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의 관계를 새롭게 보여주는 중국 쪽 문서가 80년대 후반에 공개됐다. 45년 5월 독립동맹 지도자 무정이 중국공산당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다. 이 자료는 해방 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보고서에 따르면 무정이 파견한 공작원이 1944년 6월 1920년대 당시 공산당 상하이(上海) 조선인 지부 서기를 지냈던 조선 국내의 한 인물에게 갔다고 한다. 그 인물은 여운형이 틀림없다고 필자는 단정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여운형은 공작원을 일제가 떠보기 위해 보낸 사람으로 의심하고 처음에는 상대하지 않았다. 무정은 1944년 9월, 이번에는 독립동맹의 상황과 국내 활동 방침 등을 담은 자필 편지를 휴대시켜 공작원을 여운형에게 파견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45년 1월 여운형은 독립동맹에 대표를 보내와 독립동맹의 의견을 완전히 접수하며 앞으로 독립동맹 의견에 일정하게 준해서 실천하겠다는 점, 또 이미 지하공작을 개시했다는 사실을 통고해왔다. 그리고 그 대표는 45년 5월 현재 톈진에 머물면서 매달 한 두 차례 독립동맹과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보고서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첫째 여운형과 독립동맹 공작원과의 접촉이 건국동맹의 건립과 강령 채택에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으리라는 것이다. 건국동맹이 세워진 시점은 여운형이 최초의 독립동맹 공작원과 접촉한 직후인 1944년 8월. 강령은 무정의 편지가 전달된 직후인 그 해 10월에 결정됐다. 그동안 건국동맹 연구에서는 여운형의 형무소생활(1942년 12월∼1943년 6월) 시기의 구상과 출옥 후의 1년여 준비작업 끝에 건국동맹이 건립되었다고 함으로써 건국동맹 건립의 내적 계기만 부각돼왔다. 내적 계기를 중시하다 보니 1940∼1942년, 천황 등 일제의 정치·군사 수뇌를 빈번히 접촉한 여운형의 행동은 「고급정보」탐색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평가됐던 것이다.

둘째, 무정의 보고서는 건국동맹이 차지하는 민족독립운동사상의 위상을 기존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독립동맹은 조선 국내 지부의 조직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는데 같은 보고서에는 이미 서울에 지부가 건립되었다고 했다. 서울지부란 곧 건국동맹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독립동맹에게 있어서 건국동맹은 연안_태항산_북경_만주_서울로 이어지는, 독립동맹 활동 지역에 산재하였던 독립동맹 지부 조직의 하나였던 것이다.

조선 중국 국경을 넘어, 만난을 무릅쓰고 형성된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의 연계와 공동투쟁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연합군은 원래 한반도와 만주를 주요 전장으로 상정했다. 만약 원자폭탄을 빠른 시기에 투하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을 것이고, 화북_만주_국내 조선 민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구축된 건국동맹·독립동맹 조직은 이 전투에 참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일제는 곧 항복했으며, 38선 결정과 그 후 벌어진 복잡한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두 조직은 연대를 지속하지 못했다. 건국동맹은 이남에서 건국준비위원회로 계승됐고, 독립동맹은 이북에서 조선신민당으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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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란 누구인가

독립·건국운동의 선두에 섰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5∼1947)은 일제강점기에 아주 독특한 대외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려는 공작을 숱하게 벌였다. 하지만 몽양처럼 집요하게, 대접을 잘해주려 했던 경우도 드물다. 특히 기록에 남을 일은 몽양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역이용하는데 능란했다는 점.

1919년 11월 14일. 몽양의 일본행. 도일(渡日) 목적은 일본 정부 당국자들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우리 민족의 뜻을 설명하는데 있었다. 몽양이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원, 외무위원 등으로 활약할 때였다.

몽양은 척식(拓殖)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을 두루 만나고 12월 27일 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대중연설까지했다. 동경유학생들이 주선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던 제국주의 일본 땅에서 「조선독립 만세」 「몽양일행 만세」가 터져나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에도 몽양은 숱하게 일본의 초청을 받아 도쿄를 들락날락하며 조선 문제에 대해 이야기 나눈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떤 독립운동가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활동이다.

1940년 4월에는 일본 천왕을 만났다는 일화도 있다. 몽양의 둘째 딸로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연구(96년 사망)씨의 미발간 수기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는 일본이 「일본과 중국의 화평을 위해 중국에 밀사로 가 달라」고 회유하기 위해 몽양을 초청한 대목이 나온다. 일본에 간 몽양은 각료들의 설득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결국 천왕이 직접 몽양을 부른다. 천왕은 몽양에게 『중국에 간 나의 사신들이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됐다. 일본사람을 보내서는 안되겠으니 나의 사신이 돼달라』고 요청했다. 몽양은 이에 대해 『친일과 반일은 상극이거늘 일본이 조선 민족에게 큰 재난을 들씌우고 어찌 조선사람에게 친일을 설교하는가』라며 거절했다고 밝히고 있다. 뒷날 우익 인사들이 몽양의 이런 별난 행적을 두고 친일이라는 감정적 비난을 퍼붓기도 하지만 일본의 고급 관료를 어르고 뺨치는 그의 정치 수완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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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용군

조선의용군은 1938년 일제 강점기 중국 화북의 국민당 지구에서 생겨난 항일무장부대. 42년 이 지역이 공산당에 점령되면서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는 항일 군사조직으로 탈바꿈한다. 독립동맹의 군사기구가 되는 것도 이때부터. 조선의용군은 해방 당시 민족운동단체 중 가장 많은 인원을 포괄한 전투 조직이었고 해방 이후 무려 3개 사단 규모 병력이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의 실세가 됐다.

조선의용군의 총지휘자는 독립동맹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무정(武亭·본명 김무정·1905∼1951) 장군. 함북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무정은 약관에 중국 군벌이 세운 군관학교에서 훈련받고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 마오쩌뚱 등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한 경력도 있다. 독립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참가했다가 1년만에 지도자가 된 무정은 중국 군대와 항일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조선의용군은 49~50년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 제5사단, 제6사단, 제12사단으로 개편됐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이 3개 사단이 북한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한국전쟁이 과연 일어났겠느냐는 의심까지 생길 정도로 역할이 막중했다. 하지만 무정장군은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고 한국전쟁 초기 제2군단장을 역임했다. 갈수록 홀대받던 무장은 결국 옌안파 숙청의 물결 속에서 50년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사망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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