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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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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1

입력
1990.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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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넘은 장기전… 전략없이 남진/미 본격 참전 낙동강서 난관에/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 급급/전투후에야 스미스대대 격파사실 알아/미군 무차별 공습… 인민군 「쌕쌕이」 공포6ㆍ25는 사흘을 예정했으나 실제로는 무려 3년이 걸린 전쟁이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해 인민군이 3일을 제외한 전 기간동안 각본에도 없는 전쟁을 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민군이 서울 점령 3일째인 7월1일부터 다시 남진을 시작함으로써 6ㆍ25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인민군은 이때부터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벌였다.

우리 전선사령부는 제1보조지휘소가 서부전선에서 경부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제2보조지휘소는 중ㆍ동부전선을 맡도록 새롭게 역할을 분담시켰으나 작전계획은 지휘소나 사단에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토록 했다.

인민군은 전선조성이나 보ㆍ포병간 합동작전 등의 기본적 전략도 없이 사단별로 무조건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점령으로 한창 기세가 오른 인민군은 계속 밀물처럼 국방군을 몰아붙였다. 서울 이북에서와는 달리 국방군의 저항이 날로 거세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인민군은 쉽게 수원ㆍ원주 등을 점령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그것은 미국의 신속한 개입이었다. 우리가 수원을 공격하던 7월1일 미 지상군 제24사단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이 시작됐다.

○김일성 미 개입 간과

6ㆍ25전쟁중 김일성이 범한 최악의 오판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간과한 것이다. 남침준비 당시 최용건등 고위간부들이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경고했으나 김일성은 이를 「패배주의적 자세」라고 몰아세우며 무시했다고 한다.

이어 유엔군이 참전하고 7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국방군의 작전권을 위임함으로써 6ㆍ25는 국지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됐다.

인민군 제4사단은 7월5일 오산에서 최초로 미 24사단 선발부대인 스미스대대와 조우했으나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그들을 단숨에 궤멸시켰다. 인민군은 전투가 끝난 뒤에야 이들이 미군임을 알았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한 인민군은 그 여세를 몰아 7월20일 대전을 함락시켰다.

그래서 서울 중앙청의 전선사령부도 대전 북방에 있는 한 산골사찰로 옮겨갔다(절 이름이나 위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나는 강건 총참모장과 함께 인민군 후속부대의 금강 도하작전을 시찰나갔다가 또 한번 위기의 순간을 맞았다. 강건 총참모장과 나는 어느 전투부대를 시찰한 뒤 금강 옆도로를 따라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지프를 타고 가면서 나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혼돈속에서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푸른 강물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바로 내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고막을 때리는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 했다. 국방군이 후퇴하면서 깔아놓은 지뢰를 밟은 것이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강건의 시신을 수습,전선사령부로 돌아온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우선 최고지휘관의 공백사태를 신속히 수습해야 했다.

그래서 먼저 강건의 사망 소식을 상부에 보고하고 인민군의 동요를 막기위해 이를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한달간 총지휘 맡아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즉시 나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총참모장 직무대리로 임명했으며 이에 따라 나는 내각교육성 부상이었던 남일이 총참모장으로 새로 부임해 올때까지 1개월간 인민군 총지휘관 노릇을 했다.

이 뒤에도 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해 8월초에는 전 호남지방을 장악하고 국방군과 미군을 포항∼대구∼마산을 잇는 낙동강 이남 한뼘땅에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이제 1백㎞만 더 전진하면 한반도 전체를 적화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중대한 시기에 인민군은 개전 이후 최악의 상황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개전 초기 인민군은 병력ㆍ장비면에서 모두 국방군을 압도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상황은 역전됐고 그 시기는 바로 낙동강 전투에서였다.

이 당시 인민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미군의 무차별 공습이었다.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미군은 B29,B25 등 중폭격기와 세이버전투기를 동원,전선은 물론이고 후방 전지역을 대상으로 연일 비오듯 폭격을 퍼부었다. 심할 때는 1백여대 전폭기가 동시에 떠서 융단폭격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무차별 폭격으로 인민군은 낮에는 전투나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전선부대에 대한 후방지원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인민군 병사들은 미군 비행기인 세이버전투기를 비행소음을 따서 「쌕쌕이」라고 불렀는데 비행기 소음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정도로 심한 노이로제 현상을 보였다.

○소음에도 혼비백산

이같은 융단폭격전략이 인민군에게 치명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인민군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도록 계속 다그쳤다.

내가 알기로 김일성은 전쟁중 딱 한번 서울 중앙청에 있던 전선사령부를 방문했을 뿐이다.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전선을 시찰하고 온천에서 목욕도 했다고 주장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모든 동원 가능한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쏟아붓고 돌파를 시도했으나 수만명의 병사만 잃고 전세는 오히려 날로 불리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어느날 미군이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게됐다.

이때 인민군은 모든 전력을 낙동강 전선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후방은 텅 빈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전쟁 후 급조된 일부 부대가 후방 각지에 배치되긴 했으나 이들의 전력은 보잘 것 없었다.

미군이 9월15일 인천에 상륙하자 이곳을 유일하게 지키고 있던 인민군 1개 포병연대는 전선사령부에 병력지원을 호소했으며 우리는 『무조건 싸우라』는 명령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부대는 전부대원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군과 국방군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일제히 반격작전을 전개,일부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고 우리는 9월18일경 인민군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일단 금강유역과 소백산맥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키로 하고 제1보조지휘소에 금강으로의 후퇴명령을 하달했다. 이때는 인민군 통신망도 엉망이 돼 우리는 후퇴명령을 사단까지 밖에 내릴 수 없었다.

○지휘체계 붕괴 대혼란

그러나 9월28일 서울이 함락되면서 새로운 방어선은 무의미해졌고 인민군은 지휘체계가 붕괴된 채 각자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전선사령부와 보조지휘소간의 연락도 끊겨 사령관의 행방을 모를 만큼 대혼란이 빚어졌다.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38선 이북에 방어선을 구축키로 하고 10월1일 새로운 군지휘부를 구성,서부지역 사령관에 민족보위상 최용건을 임명하고 전선사령관 김책은 동부지역을 방어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최용건 서부사령관은 서울 방어에 실패한 오기찬 제25여단장의 계급장을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뜯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 뒤에 최용건은 서울방어 실패에 대해 김일성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는데 이때도 오기찬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패전의 책임은 미국의 개입이나 인천상륙작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최고사령관 김일성 자신이 져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평남 덕천으로 전선사령부를 옮기고 38선을 돌파,계속 북진하는 국방군과 미군을 막아보려고 사력을 다했으나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남한정권이 바다에 수장되기 일보 직전 미국에 의해 구조됐듯이 김일성 정권을 최후의 순간 살려준 것은 중공군의 참전이었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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