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정조가 왜곡한 230여년 전 전남 강진 살인사건

입력
2023.06.15 19:00
25면
0 0
장유승
장유승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편집자주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늘 새롭게 해석된다. 고전을 잘 읽는 법은 지금의 현실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 짓는가에 달렸다. 고전을 통해 우리 현실을 조망하고 이야기한다.

삽화=신동준기자

삽화=신동준기자


조정을 뒤흔든 김은애 사건
정조 판결을 의심한 정약용
진실 왜곡하는 정치의 폐단

1789년, 전남 강진의 18세 여성 김은애가 안씨 할멈을 살해했다. 조정에 보고된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안씨는 시누이의 손자 최정련이 김은애를 마음에 들어 하자 둘을 짝지어 주겠다고 나섰다. 일이 잘 되면 두둑한 보수를 받기로 약속했다. 안씨는 김은애와 최정련이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은애의 혼삿길을 막아 최정련과 혼인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김은애는 아랑곳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 계획이 허사로 돌아가자 악에 받친 안씨는 김은애가 시집간 뒤에도 몰래 최정련을 만난다고 모함했다.

2년 동안 뜬소문에 시달리던 김은애는 마침내 칼을 들고 안씨를 찾아갔다. 안씨는 사과는커녕 적반하장이었다. 김은애는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둘렀다. 열여덟 곳을 찔린 안씨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김은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최정련을 찾아 나섰다. 중도에 만난 어머니가 만류하는 바람에 두 번째 살인은 미수에 그쳤다.

강진 현감이 현장 검증에 나섰다. 시신은 피투성이였다. 안씨가 입은 흰 적삼과 푸른 치마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조사를 마친 현감은 관찰사에게 사건을 넘겼다. 관찰사가 김은애를 아홉 차례 심문하였으나 진술은 변함없었다. 결국 정조 임금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정조는 김은애를 칭찬하며 석방을 명했다.

"정숙한 여인이 음란하다는 무고를 받은 것은 천하의 원통한 일이다. 만약 김은애가 춘추전국 시대에 태어났다면 '사기' 열전에 실렸을 것이다."

정조는 풍속 교화에 일조할 것이라며 사건의 개략과 판결 내용을 베껴 널리 알리는 한편, 이덕무에게 전(傳)을 짓게 했다.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는 '은애전'이 이것이다. 이덕무는 이 글에서 정조를 극찬했다. "성상께서 너그럽고 어진 마음으로 중죄인을 심문하여 200명이나 사면을 받았다." "김은애를 석방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판결이 충성과 효도를 권장하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에 실려 있는 사건의 진상은 다르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김은애는 시집가기 전부터 최정련과 간음했다. 안씨는 대가를 받고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고 장소를 제공했다. 그런데 김은애가 시집가는 바람에 수입이 끊기자 소문을 퍼뜨렸고, 김은애가 입을 막으려 노파를 죽였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2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했으니 그의 전언은 믿을 만하다.

정약용의 사건 분석에 사사건건 비판적이었던 '흠서박론'의 저자 심대윤도 이 사건만큼은 정약용을 편들었다. 김은애가 간음을 저지르고 안씨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김은애는 안씨를 죽인 뒤 최정련까지 죽이려고 했다. 사건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최정련이 안씨와 공모하여 김은해를 모함한 것이 사실이라면 최정련은 처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심대윤은 당시 사건을 수사한 자들이 젊고 아름다운 김은애를 불쌍히 여겨 사건의 진상을 왜곡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 사건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하지만 정조가 판결한 사건을 누가 뒤집겠는가. 200년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 사건의 진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정조를 칭송하고 유교 윤리를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사건이 일어나면 으레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개입하곤 한다. 이념과 진영 논리를 앞세워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다. 요즘은 그 왜곡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사건의 사회적 의미는 섣불리 단언할 수 없다. 개별적 사건을 확대해석하는 것도 위험하다.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자를 조심하라.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