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며 집에 온 엄마는 배낭에서 밑반찬 몇 가지를 부려놓았다. 엊저녁에 버무렸다는 알타리무김치와, 간이 맞을랑가 모르겠다는 코다리찜과, 누군가 쑤어 주었다는 도토리묵과 달래장이 나왔다. 반찬통을 풀며 집어먹으며 손가락을 쪽쪽 빨며 홍홍홍 콧소리를 내며 좋아라 하는데, 도대체 이걸 메고 어딜 지나가던 길이신지. 일하는데 방해된다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엄마를 차에 태워 바람이나 쐬러 갑시다 했다. 한겨울보다도 요맘때가 더 꽃이 간절해지는 법. 화훼농장에서 꽃구경 실컷 하고 자그마한 화분 하나씩 품에 안고 내친김에 참숯돼지갈비까지 먹고 헤어졌다. 눈도 즐겁고 배도 부르고 아이 좋아, 엄마 콧소리가 듣기 참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누룽지를 끓였다. 배가 부른데도 어쩔 수 없었다. 누룽지에 달래장을 어찌 미룬단 말인가. 얼마 만에 선사 받은 엄마표 누룽지인데. 봉지 한 가득 채운 양으로 보아 적어도 한 달 가량은 작정하고 긁어 모은 것이 분명했다. 찬밥을 넓게 펴서 급하게 편법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밥을 다 푸고 난 다음 남은 눌은밥을 그대로 더 눌려 만든 것. 어차피 같은 쌀밥 같은 방식인데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지만 천만의 말씀. 누구에게도 양보 못할 궁극의 누룽지 되시겠다.
내 밥맛의 기원은 압력솥에 지은 밥에서 온다. 그 맛은 소리로부터 시작한다. 경쾌한 방울 소리, 압력을 빼는 소리, 뚜껑을 열 때 패킹이 풀리는 소리, 바삐 움직이며 밥알을 헤집는 주걱의 섬세한 소리. 폭발하듯 솟아오르는 향긋한 밥 냄새나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이나 차르르 흐르는 윤기는 그 다음이다. 엄마는 아직까지 압력솥에 밥을 짓는다. 웬만한 요리는 버튼 조작으로 다 되고 말까지 건네는 다재다능 전기밥솥도 있었고, 코끼리니 뭐니 밥맛 좋다는 밥솥을 다 거쳐왔지만 결국 고전적인 p사의 압력솥으로 복귀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상태의 누룽지는 그 압력솥에서 가장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
밥을 다 푸고 나면 그때부터 누룽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밥알은 최대한 걷어 내고 살짝 눌은 눌은밥만 남겨 약한 불에 올려놓는다. 자세히 들어보면 이때에도 나지막하게 타닥타닥 소리가 나고 있겠지만,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고 맛이 어떠니 다음엔 뭘 먹니 식탁에 집중하느라 패스. 내 맘 같아선 조금 더 눌려 홀랑 떨어질 정도로 바삭하게 만든 다음, 튀겨서 설탕이나 꿀을 뿌려먹으면 좋겠지만, 식탁의 평화를 위해 잠시 양보한다. 밥을 다 먹을 즈음 불을 끄고 찬물을 붓는다. 끓이는 것이 아니라 찬물에 불리는 것. 훌훌 일어나는 상태가 아니라 애써 긁어내야 하는 상태. 그걸 긁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는 그 권리를 절대 넘기지 않았다. 숟가락 목에 바싹 가깝게 쥐고, 입술은 동그랗게 모은 채, 솥 긁는 소리는 내지 않으면서 살살. 사과속살을 긁어 이유식을 만드는 사람처럼 정성과 집중으로 누룽지를 완성했다. 분배 역시 아버지 담당이었는데, 가장도 엄마도 장남도 막내도 소용없었다. 공명정대 공평무사. 닭 모가지는 포기해도 누룽지는 포기 못 하지. 한 숟가락이면 한 숟가락 반 그릇이면 반 그릇.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라. 그것이 압력솥을 건네 받은 아버지의 임무이자 의무였다.
우리는 누룽지를 먹기 위해 식사를 하는 사람들 같았다. 식사 후 뒤따라오는 마지막 입가심으로서 누룽지가 아니라, 식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환희. 주요리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무엇을 먹었든 얼마나 먹었든 누룽지는 누룽지. 황금빛의 구수하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누룽지의 맛. 언젠가 스페인에서 빠에야를 먹던 중 가운데 눌어붙은 부분이 더 맛있다고 얘기하자, 누군가 그랬다. 그걸 ‘소카라엣(Socarraet)’이라고 한다고. 검게 탄 것이라는 뜻인데, 어렸을 때 서로 먹겠다고 난리였다고. 그래서 그 빠에야 누룽지만큼은 가족의 제일 어른이 마지막으로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아 여기나 저기나, 누룽지는 누룽지여라.
소설가
※ 천운영 작가가 맛, 그 중에서도 글맛이 넘치는 글을 선보인 ‘천운영의 심야식탁’ 연재를 오늘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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