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수제화 시장의 성지로 불리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거리’엔 한 평생을 신발에 바쳐온 장인들의 가게가 빼곡하게 들어서있다. 하지만 장인이란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근무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대개 유명 수제화 브랜드 또는 그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고 신발을 납품하는데 회사로부터 일감을 받고 회사의 지휘ㆍ감독을 따름에도 이들의 직위는 개인사업자다. 임금 근로자가 아니다 보니 4대 보험이나 퇴직금, 연차휴가도 없다. 대신 부가가치세와 사업소득세를 떠안고 있다. 그 와중에 20년째 공임이 동결되면서 수입이 나날이 줄어 이제는 최저임금 수준의 돈도 벌지 못한다고 호소한다(본보 5월31일자 ‘뷰엔’ 참고). 참다 못해 장인들이 직접 거리로, 법원으로 나섰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앞으론 성수동 수제화 장인도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근로자가 되면 퇴직금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구두제조공 고모씨 등 15명이 구두 제조업체 A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고씨 등은 1998~1999년 사이 A사에 고용돼 저부 작업(구두의 골에 봉제된 가죽을 씌우고 창을 붙여 건조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외환위기(IMF) 직후 A사가 저부공들을 도급계약 형태로 전환하기로 함에 따라 고씨 등은 회사와 제작물 공급계약 등을 체결하고 사업자등록을 한 다음 계속해서 동일한 작업을 했다. 그렇게 짧게는 4년, 길게는 15년을 A사를 위해 일했지만 회사는 이들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고씨 등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회사에 근로를 제공했다”며 회사를 상대로 재직기간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원고(고씨 등)를 상대로 한 피고(A사)의 관리행위가 대등한 계약 주체들 사이에 약정된 업무수행 일환”이라며 “종속적인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고씨 측 손을 들어줬다. △회사가 업무 내용을 정하고 상당한 지휘ㆍ감독을 했으며 △원고들이 회사의 취업규칙에 준하는 정도로 계약관계에 구속돼 있었기에 고씨 등을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원고들이 독립해서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하지 않았고 장기간 A사에서만 저부작업을 해왔던 점 등도 이 같은 판단 근거로 작용했다.
또 고씨 등이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아 근로자가 아니라는 회사 측의 주장에는 “원고들과 회사의 지위, 원고들의 근무형태, 원고들이 회사 퇴직 후 사업자등록을 하게 된 경위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때 이 같은 사실만으론 원고들이 근로자라는 사실을 뒤집기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도 같은 취지로 회사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
원고 측 소송 대리를 맡은 최승호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저임금에 시달려온 구두 제조공 문제를 푸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며 “근로자성이 인정되면 이를 기반으로 근로기준법 준수 등을 요구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당사자들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인식하고 사용자와 협상을 시도하는 등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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