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회는 하염없이 이런저런 전쟁을 치른다. 다툼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길은 없을까?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옐라 레프만은 전 세계 어린이가 책을 읽는 것으로 길을 찾는다. 온갖 고초 끝에 1949년 국제어린이도서관을 세우고, 1953년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ㆍInternational Board on Books for Young People)를 만든다. 특히 IBBY는 아동 · 청소년 문학을 통해 국제간 교류를 꾀하는 비영리국제기구로, 한국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KBBY)를 비롯 전 세계 75개 회원국들이 활발히 연대하고 있다.
지금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는 바로 이 IBBY가 추천하는 61개 나라의 191권 도서와 격년 선정하는 우수 도서 원화 및 아트프린트를 볼 수 있는 귀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 ‘작은 시민들’이 열리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평화의 가치를 전달하는 작품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더 큰 마음을 지닌 세계 시민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는 전시 취지가 레프만의 간절한 육성인 듯 아득하고도 뭉클하게 다가온다. 이 근사한 전시장에서 온 세상 곳곳 그림책과 작가를 접하고 나온 어린이가 언제든 누구에게든 깊이 공감하고 연민하는 세계 시민의 진정한 자질을 품게 되면 좋겠다. 아이와 함께 온 어른이 내 아이와 이웃 아이는 물론 먼 나라의 아이가 함께 평화롭게 일하고 연대할 미래 세계를 그려보면 좋겠다.
상당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그림책 작가 최숙희의 최근작 또한 작은 시민을 위한 선물이다. 표지를 꽉 채운 어린 얼굴, 얼굴 가득한 두 눈, 두 눈 가득한 슬픔… 그리하여 이제 한 방울 눈물이 막 떨어지는 참이다. 눈물 방울 속에는 그에 맞춤한 크기의 세로쓰기 표제 ‘너를 보면’이 담겨 있다. 표제의 크기를 이토록 절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투명하고 연약한 눈물의 속성을 UV 코팅 후가공으로 구현한 표지가 그래서 더욱 눈길을 끈다.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너’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슬프다는 것일까. 표지를 열면 무채색 토끼풀밭이 펼쳐지고, 그 토끼풀 몇 잎이 초록빛 생기를 회복하며 날아가는 쪽의 속표지는 창 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뒷모습이다. 창문 안쪽 실내에 펼쳐진 초록과 연두 바탕의 초록 토끼풀 무늬를 보면 아이의 거처는 다행히 문제없이 평안하고 쾌적해 보인다. 그렇다면 ‘너’란 바깥에 있는 그 누구인 모양이다. 다음 장면의 ‘한참 동안 /너를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아이의 정면 모습을 통해 슬픔의 원인이 창 밖 풍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주인공 아이의 슬픔을 자아내는 주체들인 ‘너’가 등장한다. 나무 그루터기만 앙상히 남은 숲속을 어찌할 바 없이 헤매는 여우, 공단 지역 굴뚝이 뿜어내는 매연 속을 떠도는 나비,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감당하며 쩍쩍 갈라진 땅을 걷는 코끼리, 깡통 묶음 플라스틱 고리에 걸려 쩔쩔매는 바다사자, 전쟁 폐허 속에 홀로 남겨진 고양이, 또래들에게 따돌리는 백색증 원숭이, 쓰레기장에 버려진 강아지, 이 모두는 현실 세계의 폐해 속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어린 존재들이다.
아이는 바깥 세계의 고통을 보며, 마음 깊이 그 친구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바란다. 장면들 사이사이에 펼쳐지는 아이의 판타지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린 생명들 저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제 생명대로 제 진면목대로 마음껏 숨 쉬고 날고 헤엄치고 뛰어 노는 그 세계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의 풍경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어른 독자는 슬프기보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너를 보면
최숙희 지음
웅진주니어 발행∙44쪽∙1만 3,000원
아이 또한 슬픔이 쌓이고 쌓여 안타까움에 이른다. 내내 고여 있던 눈물이 마침내 뺨 위로 흘러내린다. 마지막 장면은 이제 막 눈물을 그친 아이가 등장동물들 사이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미녀와 야수’의 벨이 더없는 연민의 눈물로 야수를 살려내고 마법을 풀었듯, 고난을 겪던 동물들이 생기를 되찾고 자유로워진 것이다. “함께 울어줘서 고맙다”며 오히려 아이를 위로하면서.
어린 아이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시기를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꼭 필요한 선물이 바로 이런 그림책이다. 우리 대다수가 진정한 시민이 못 된다고 여긴다면 바로 그 시기에 적절한 선물을 받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전쟁 폐허 속에 세워진 도서관, 그 서가에 책 선물을 꽂아주었던 전 세계 곳곳의 시민들, 그 책을 읽으며 허기와 빈곤을 잊고 다툼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작은 시민들을 떠올려 본다.
이상희 시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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