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년생인 인척과 지인들이 시댁과 처가로 명절 나들이 뒤에 올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에서 이런저런 생채기를 직감한다. 수십 년 경력자라고 해도, 모처럼 본가에 다녀 온 비혼의 남녀라고 해도, 종이 칼에 베인 듯 애매한 통증의 이런 생채기에서 완벽히 무사할 수 있을까. 세대 차이, 서열 차이, 남녀 차이, 가정 및 지역 문화 차이며 빈부 차이까지 무릅써야 하는 그 며칠간 동고동락의 후폭풍을 우리 사회가 ‘명절 증후군’으로 이른 지도 오래되었다. 위키백과가 정의하기로 ‘대한민국에서 명절을 보내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이란다. 버젓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를 확인하자니, 이 땅을 뜨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최소한 한 해 두어 번은 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최승훈이 그린 열여덟 장면의 극사실주의 손 그림과 김혜원이 그 손의 주인공들에게서 요령 있게 받아 적은 이야기로 엮은 그림책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로봇이 사람 손을 대신하는 인공지능(AI) 시대의 역발상 기획인가 싶지만, 2015년부터 3년여에 걸쳐 진행된 충남 부여군 양화면 송정리 그림책마을 사업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이다. 젊은 작가들이 한적한 시골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보고 들은 감동을 갈무리한 이 그림책은 무엇보다 이제 막 부풀어 오르는 명절 증후군의 생채기를 고즈넉이 어루만져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케테 콜비츠가 생각나는 팥알 이삭이며 검부러기를 모아 담고 있는 손 그림의 표지를 열고 손의 주인공들을 크로키한 면지를 넘기면 울림이 큰 구어체 문장을 만나게 된다. “사람은 말여, 뭣보다도 손이 곧 그 사람이여./ 사람을 지대루 알려믄 손을 봐야 혀./ 손을 보믄 그이가 어트게 살아온 사람인지,/ 살림이 편안헌지 곤란헌지,/ 마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꺼정 다 알 수 있당게./ 얼굴은 그짓말을 혀도 손은 그짓말을 못 허는 겨.” 느릿느릿 담담하고 차분한 충청도 사투리 육성을 그대로 옮겨 적은 이 머리말을 읽지 않았다면, 얼핏 비슷비슷해 보이는 주름투성이 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지 못했으리라. 또한 그 손의 주인공이 얘기하는 오른쪽 페이지의 구어체 문장을 읽는 마음이 그토록 고요해지지 않았으리라.
삽 자루를 불끈 쥔 손의 주인공은 평생 농사꾼 79세 할아버지, 통통한 손의 주인공은 조실부모한 남편이 안쓰러워 평생 밥상 봉양에 공들였다는 73세 할머니, 전정가위 잡은 모지라지고 갈라진 손톱의 주인공은 ‘쩨깐’한 체구로 전국 팔도로 옹벽을 쌓으러 나다녔던 84세 할아버지, 알알이 까만 아로니아 열매에 물든 손은 자식들 목에 밥 넣을 생각만으로 온갖 일 해온 76세 할머니, 짚 가닥 꼬는 주름투성이 손은 벼 보리 밀 농사 지으며 평생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적거려서’ 식구들 먹여 살린 79세 할아버지, 시계 차고 호미 자루 쥔 손의 주인공은 어머니 고생 시킨 아버지 닮지 않으려 애쓴 끝에 1,000평 논농사 지으며 밤나무 가꾸는 70세 할아버지, 약지 중지 검지 끝이 으스러진 손의 주인공은 자동차 사고를 손으로 막아 수십 명을 살려내었던 79세 할아버지, 주름이 졌을 뿐 마디도 없이 나긋한 손의 주인공은 평생 바느질 일로 살고 지금은 그림책 읽는 재미를 즐기는 74세 할머니…
백일홍 꽃을 들고 있어서만은 아닌 듯 유난히 인정스럽다 싶은 작은 손 그림에는 눈이 동그래지는 반전의 텍스트가 이어진다. “아이구, 참 고생 징그럽게 혔네./ 우리 집 냥반이 일찍 떠나는 바람에/ 내가 저수지에서 매운탕 장사 30년 했슈./ 낚시꾼 실어 나르구 밥혀 주구./ 낚시꾼들이 나보고 여자 뱃사공이라구 혔어./ 그렁게 고생혔다구 울 애들이 잘 혀유./ 우리 외손녀가 만날 전화해서 그려./ ‘할머니, 오래 살으세유. 사랑해유.’/ ‘아이구, 울 애기 사랑혀. 울 애기 사랑혀.’/ 집도 안 고치구 이냥 우습게는 살아도 늦복은 쪼매 괜찮여./ 이따가 온디야. 오면 이 꽃 줄라구.”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김혜원 글∙최승훈 그림
이야기꽃 발행∙40쪽∙1만5,000원
‘내 살아온 이야기가 장편소설’이라는 어르신들 푸념이 나름대로 사무치게 다가오는 나이라면 이 손 그림 한 장 한 장의 인생 서사를 바로 그 장편소설로 읽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지하철에서 시골 어르신이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맬 때 얼른 다가가 손 잡아드릴 마음이 생길 듯하다. 그렇다. 우리는 그저 사람이다. 손을 지닌 사람, 그 손을 쓰며 살아가는 크고 작은 사람이고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린 사람이다. 때로 답답하고 까탈스러운 우리의 연로한 어버이들이 능력껏 자기 삶의 장인(匠人)으로서 살아온 날들을 곰곰 읽어보는 것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분별 망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명절증후군 치유 처방으로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느릿느릿 읽기, 조금 더 시간이 난다면 케테 콜비츠의 판화집과 리처드 세넷의 ‘장인’ 읽기를 권한다. “굽은 발로 절룩거릴지라도 그 자신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헤파이토스,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인간의 모습은 바로 그일 것이다.”(‘장인’에서)
이상희 시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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