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작가이자 소설이론가였던 에드워드 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라고 하면 스토리다. '왕이 죽자 슬픔에 못 이겨 왕비도 죽었다'라고 하면 플롯이다." 서사를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물론 플롯이다. 창작자는 개별적인 사건들에 인과관계를 위시한 내적 질서를 부여해 스토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열함으로써 플롯을 구성한다.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크리스토퍼 놀런의 가장 큰 특색은 플롯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야기를 다뤄내는 화려하고 복잡하며 창의적인 작법이 두드러지는 그의 영화들을 지켜보노라면 놀런은 흡사 플롯의 마술사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야심찬 플롯은 시간의 순서를 뒤섞고 공간적 맥락을 헝클어 사건과 사건이 새롭게 설정된 질서 속에서 연결되는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놀런은 시공간의 층위를 교차시키거나 도치하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지적 유희를 한다.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고 이야기가 쌓이는 양식이다.
슈퍼 히어로 장르의 스토리텔링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웠던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잠시 제쳐두면, 그의 모든 영화가 시공간적 설정이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미행'은 시간의 흐름을 온통 분절시키고, '프레스티지'는 과거와 현재를 복잡하게 오간다. '인터스텔라'에서는 한 행성에서 1시간이 소요되는 동안 지구에선 7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덩케르크'에선 서로 다른 속도로 펼쳐지던 세 개의 시공간이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의 접점에서 만난다. 그런 특성이 가장 약한 '인썸니아'조차 시공간적 무대를 백야가 펼쳐지고 있는 알래스카로 설정함으로써 현실의 시간에서 밤을 없앤 채 낮만 이어지도록 만든다. 놀런의 플롯을 다루는 솜씨가 가장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은 그 중에서도 '메멘토'와 '인셉션'일 것이다. 독창적인 플롯을 지닌 이 두 편은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의 비극을 다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메멘토’
'메멘토'의 주인공은 참혹하게 살해당한 아내의 복수를 하려고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그런데 그는 살해 사건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놀런은 이 이야기를 굉장히 복합적인 플롯에 담아냈다. 이 영화의 현재 장면들은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고, 과거 장면들은 시간 순서대로 연결된다. 컬러로 표현되는 현재와 흑백에 담긴 과거 장면이 각각 22개의 신(Scene)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면 길이가 현재는 길고 과거는 짧아서 서로 급격하게 커브를 틀듯 갈마들며 꼬리를 문다. 여기에는 회상이나 상상 장면까지 담겨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하다. 단기 기억상실증을 가진 인물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다루기 쉽지 않을 텐데, 왜 놀런은 굳이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구조까지 짜 넣었을까.
관객 입장에서는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재 장면들을 보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에피소드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보게 될) 그 장면 이전의 사건을 그 순간에는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서 직전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 상황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관객은 이처럼 뒤틀린 플롯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와 유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간 흐름을 뒤틀어버리면 관객은 인물 심리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어려워지기에 그 인물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면밀히 관찰하는 방식으로 관람하게 된다. 결국 이 지적인 스릴러는 독특한 플롯을 통해 관객의 능동적 관람 태도를 저절로 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인셉션’
'인셉션'은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특정 정보를 입력시키려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SF다. '인셉션'은 블록버스터가 허용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플롯을 가진 영화라고 할만 하다. 관객 입장에선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꿈 속 장면인지 아니면 현실의 장면인지를 적어도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알 수 없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극중에서 꿈 속의 꿈(속의 꿈)이 연거푸 펼쳐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셉션'은 좌표평면에 놓인 이야기의 곡선으로 표현해볼 때, 시간 진행에 따른 X축이 중요한 대부분의 영화 플롯들과 달리, 서로 다른 흐름으로 펼쳐지는 시공간들의 층위와 관계를 드러내는 Y축이 더 중요한 플롯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겹으로 설계된 꿈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루빅스 큐브처럼 플롯을 가지고 노는 놀런은 대체 그 꿈은 누가 꾸는 꿈인지, 그게 정말로 꿈이기는 한 건지, 꿈과 꿈 혹은 꿈과 현실이 정확히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짐작하기 쉽잖은 이야기를 펼쳐내며 관객을 시종 몽롱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관객의 상황은 이 영화 속 핵심적 정서와 고스란히 맞닿게 된다. 이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는, 헤어나올 수 없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B tv '영화당'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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