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 감독을 생각하면 푹푹 찌는 한여름의 대구가 생각난다.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던 어느 여름날, 나는 친구에게서 빌린 비디오테이프를 VCR 데크에 넣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는 심심했다. 주인공이 서핑 보드를 들고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갔고, 바다가 나왔고, 다시 주인공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갔다. 화면만큼이나 줄거리도 단순했다. 청소부 일을 하는 시게루는 어느 날 쓰레기통에서 서핑 보드 하나를 줍는다. 그날부터 서핑에 푹 빠진 시게루는 바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2). 주인공 시게루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영화는 한없이 조용했고, 담담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가 ‘세상에는 이런 영화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VCR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그 이후로 나는 기타노 감독의 팬이 되었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2)
폭력적인 기타노 영화와 정반대
별다른 사건도 대사도 없어
침묵으로 그린 풍경화 같아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기타노 감독의 영화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폭력 묘사가 많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기타노 본인이 배우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역시 끝까지 보고 나면 기타노 감독 특유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말을 하는 사람 대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을 보여 준다든가 이야기가 막 시작되려고 할 때 카메라를 돌려버린다든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보여 주는, 참으로 이상한 방식의 리듬이다. 침묵이라는 물감을 써서 허공에다 그려 놓은 풍경화 같기도 하다.
기타노 감독은 코미디언으로도 유명하다. 1972년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그는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 냈고, 일본의 만담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코미디언으로서 그는 쉴 새 없이 말한다. 상대방을 구박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그가 만들어내는 영화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다. 인물은 말하기보다 행동하고, 대화는 자주 끊어진다. 그는 ‘말하기’와 ‘침묵하기’ 사이에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예술을 찾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하나비’(1998)는 기타노 감독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보여 주는 표지판 같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비(1998)
불치병 걸린 아내와 떠난 여행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뿐
‘하나비’에는 잠복근무 중 총에 맞아 다리를 평생 쓰지 못하게 된 형사 호리베(오스기 렌)가 등장한다. 호리베의 콤비이자 절친인 니시(기타노 다케시)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사채를 끌어다 쓰는 인물이다. 형사를 그만두고 은행을 털게 된 니시는 주위 사람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보내는데, 호리베에게 보낸 것은 그림 그리는 도구다. 선물을 받은 호리베는 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도화지에 점을 찍으며 그림을 그린다. 점묘법으로 자신이 보는 세상을 표현한다. 점을 계속 찍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의 윤곽이 보인다(영화에 나오는 그림은 감독 자신이 그린 것이다).
니시가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의사의 권유 때문이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니시에게 의사는 짧은 말을 건넨다. “부인과 대화를 많이 나누세요.” 의사의 권유는 그랬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을 뿐이다. 여행 중에도 삶은 자주 망가진다. 트럭이 카메라 앞을 지나가는 바람에 사진을 망치고, 잘 가꾸어 놓은 정원에서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말하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대화하는 대신 웃는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뿐이라는 듯.
●소나티네(1993)
폭력으로 점철된 야쿠자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익살스러운 풍경
죽음에 매혹된 기타노 대표작
영화 ‘소나티네’(1993)는 도쿄에서 활동하던 야쿠자 일원들이 조직의 명령으로 오키나와에 갔다가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은둔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대화 대신 놀이가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갑자기 오키나와에서 살아가게 된 야쿠자들은 대화를 멈추고 아이들처럼 놀기 시작한다. 모래판에서 스모를 하고, 폭죽으로 전쟁놀이를 하고, 모래밭에 함정을 파 동료들을 골탕 먹인다. 죽음과 가까이에서 살아가던 야쿠자들이 어느 순간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중간 보스인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는 오키나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강하면 권총을 안 써. 무서우니까 쏘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죽는 걸 너무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져.” 죽는 걸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지기 때문에,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다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아이러니야말로 기타노 감독의 영화 곳곳에 흐르는 정서일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다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 속 문장을 떠올렸다. “전에는 우리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어. 하지만 이젠 안 해. 왜 그럴까?… 죽음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지. 이야기할 게 남지 않은 거야.” 죽음은 기타노 감독의 영화 가까이에 서 있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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