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동인데요. 옆집에서 연기가 납니다.” 지난해 8월 1일 오전 3시5분, 경기 안성소방서로 화재신고가 접수됐다. 최초 신고자는 이웃 주민이자 안성소방서에 소속된 현직 소방관. 그의 초기 진압 노력 덕에 2층 단독주택 1층 내부에서 난 것으로 추정되는 불은 소방대원들이 출동하기도 전에 이미 진화가 됐다. 불꽃은 사그라지고, 검게 그을린 흔적만이 출동 소방대원을 맞이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던 소방대원들은 이상한 냄새에 고개를 갸웃했다. 탄내에 덧씌워진, 생경한 냄새였다. “저게 뭐지?” 누군가 현관문 앞쪽, 화장실 앞을 가리켰다.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이 대원들 눈에 띄었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화재는 분명 아닌데.”
엎드려진 채 발견된 사람은, 집주인 정진오(당시 63·가명)씨였다. 엄청난 양의 피 웅덩이 위, 숨이 멎은 채였다. 안방 침대 위에서도 시신이 발견됐다. 정씨 아내 고찬희(당시 56·가명)씨였다. 침대 역시 피범벅이었다. “아, 피 냄새였구나.”
현장감식과 검시가 곧바로 시작됐다. 정씨 시신을 뒤집자, 칼로 자른 듯 깊이 베어진 목의 상처가 또렷했다. 고씨 시신에서는 남편과 비슷한 목 상처에다 ‘둔기에 맞은 듯한’ 두개골 함몰이 확인됐다. 사건을 맡았던 유재수(44) 안성경찰서 형사3팀장은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으로 보였다”면서 “지금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말했다. 단순 화재 사건이, 살인 사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경찰서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총 89명으로 수사전담팀이 꾸려졌다. 팀 전원이 현장 주변 탐문, 폐쇄회로(CC)TV 및 차량 블랙박스 조사, 수색 등에 동원됐다. 하지만 쉽지 않은 수사임을 수사팀은 직감했다. 시신 외, 현장 어디에서도 범인을 추적할 만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리고 ‘왜’, 모든 것은 백지였다.
사고 접수 3시간이 조금 안 된 오전 6시. 경기남부경찰청 과학수사계 소속 프로파일러 신경아(36) 조남경(34) 경장이 긴급 호출을 받았다. 프로파일러가 사건 초기에 투입되는 건 흔치 않다. 그만큼 긴박한 상황, 둘은 3시간 남짓 뒤 현장에 도착했다. 무에서 유를 찾아내야 하는 숙제가 이들에게 내려졌다.
피해자 분석부터 진행됐다. ‘왜 이 부부가 타깃이 됐을까’가 이들이 풀어야 할 첫 번째 퍼즐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2층 단독주택은 동네에서 손 꼽힐 정도로 좋은 집이었다. 잔디 깔린 정원은 완벽하게 관리된 상태였고, 집 안에는 수석 등 값나가는 물건들이 장식장에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피해자들 주변을 탐문한 수사팀은 “수십 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아온 부부는 20억원대 자산가”라고 했다. “이웃과 자주 교류하며 신망도 두터운 편”이라고도 했다. 신 경장은 “외부 사람들이 부부의 생활 습관이나 경제적 수준 등 여러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탐문만으로는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범인 행적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하는, 두 번째 퍼즐 작업에 들어갔다. 고씨 시신이 발견됐던 안방 침대 주위에는 비산혈흔(충격에 의해 피가 튄 흔적)이 침대를 기준으로, 낮은 곳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됐다. 누워 있거나,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당했다는 흔적이다. 검시관은 “범인에게 반항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기습적으로 공격 당해 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반대로 화장실 앞에서 발견된 정씨 시신에서는 반항한 흔적에, 여러 군데 찔린 상처가 나왔다. 화장실 바로 옆에는 작은방이 있었다. 신 경장은 “작은방에서 나오던 도중 갑작스레 흉기를 든 범인과 마주친 뒤 다툼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범인이 안방에 있던 아내를 먼저 살해한 뒤 그 소리를 듣고 남편이 작은 방에서 나오자, 싸움을 벌이고 결국 살해했다’는 쪽으로 당시 상황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딱 거기까지였다. 얼개는 세워졌지만, 이를 뒷받침할 단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퍼즐은, 여전히 조각조각,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신 경장과 조 경장의 마음이 바빠졌다. 밤낮없이 현장에 드나들며 사건에 매달렸지만, 시간만 야속하게 흘러갔다. 8월 한여름, 사건 현장에서는 혈액이 부패되는 냄새가 탄내와 섞여 진동을 했다. 현장을 둘러보고 다시 둘러보는 것 자체가 고욕이었다. 사건 발생 이틀 뒤인 3일부터 각각 경기북부경찰청과 충남경찰청, 인천경찰청에서 지원 나온 프로파일러 3명이 분석 작업에 합류했다. 든든한 우군이었다.
5인의 프로파일러들은 “왜 살인을 했지?”, 범행 동기 부분을 두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범행 이유부터 다시 추론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유를 안다면 수사 대상을 특정하거나 범위를 좁힐 수 있다는 게 수사 전문가들의 경험이자 노하우였다.
먼저 ‘청부살인이 아니겠냐’는 의견이 제시됐다. 잔혹한 살해 방식이 근거였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청부살인 패턴과 너무 달랐다. 청부살인의 경우 사건 현장이 피해자 집보다는 범인이 범행하기 유리한 장소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청부살인범은 길을 가던 누군가를 살해할 때도 본인이 익숙하거나 범행하기 용이한 곳을 골라, 그곳에서 피해자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낯선 피해자 집까지 침입해 범행을 벌이는 게 흔치 않다고 이들은 배우고 경험해왔다.
또 청부업자는 대상을 상당 기간 미행하기도 하는데, 이번 사건 피해자가 찍힌 CCTV에서는 어떤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신 경장은 “무엇보다도 청부살인업자라면 이렇게까지 과도한 살해 방식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잔혹하긴 했어도, 전문가의 깔끔함은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는 재산이 많은 만큼, 누군가에게 재산관계 등으로 원한을 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형사들이 아무리 탐문하고 조사해 봐도 이들에게 앙심을 품을 만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수사팀은 초조해졌다. 좀 더 지나면, 어쩌면 장기 미제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이때 새로운 단서가 하나 발견됐다. 사건이 일어나기 약 2주 전인 7월 19일, 현장에서 5분 정도 떨어진 집에서 야간 주거침입 미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얼핏 그냥 지나갈 수도 있던 사건이었지만 이 동네는 지난 3년 동안 강도 및 절도 범죄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침입 사건이 두 건이나 발생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게다가 ‘누군가’ 주거침입을 시도했던 집은 사망한 정씨 부부 집과 함께 인근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집이었다. 프로파일러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이 조금은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범인은 돈을 목적으로 피해자 집에 침입, 발각되자 과도한 공격성을 보여 피해자들을 살해한 뒤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몰린 사람이자, 피해자들은 물론 이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
범인은 뜻밖의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건 접수 열흘째인 10일 오후 3시30분쯤, 119상황실에서 수사팀으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자살할 것 같다고 아들이 신고를 했는데요. 그 아버지란 사람, 부부 살인 사건을 처음 신고했던 이태호(가명)씨입니다. 저희 소방서 직원이요.” 처음 화재 신고를 한 사람이 갑자기 자살을 시도하다니. 수사팀은 “사건 연관자가 자살을 한다는 건 스스로 범인임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서둘러야 했다. 이씨가 숨지면 많은 사실이 비밀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차량 추적 끝에 한 복도식 아파트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을 앞에 두고, 이씨는 15층 난간 너머로 몸을 던지려던 참이었다. 형사들이 바로 달려가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씨는 형사의 손을 잡고 발버둥치다 아래로 떨어졌다.
유 팀장은 “아무래도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씨는 발버둥치던 반동 때문인지 바로 아래층 난간에 부딪힌 뒤 안쪽 복도로 떨어졌다. 이씨는 또 다시 난간을 넘어 투신했다. 그러나 다시 13층 난간에 걸렸다가 복도로 떨어졌다.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겠죠”라고 유 팀장이 말했다.
구급차 안에서 이씨는 범행 사실을 순순히 털어놨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정씨 부부를 본인이 살해했고, 죄책감에 제초제와 소주를 마신 채 아파트로 가 자살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일주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이씨는 8월 16일 퇴원과 동시에 체포됐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상습 도박으로 2억6,000만원 빚에 몰려 제2·3금융권까지 손댄 상태라고 진술했다.
“이씨는 평생 남에게 자신의 깊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아내에게조차 도박 빚 관련 얘기를 한 마디도 안 한 채, 한쪽에서는 완벽한 남편으로 살고 있었던 거죠. 아마 진작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든 털어놨다면,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씨와 최종 면담을 마친 조 경장은, 사건 동기를 이렇게 정리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모든 걸 털어놓고, 내려놓은 이씨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이씨는 지난 2일 강도살인 및 현주건조물방화죄로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이씨도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목숨까지 빼앗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사형을 선고하지 않은 건 그나마 법원이 내린 최소한의 배려였다.
안성ㆍ수원=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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