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글거리는 단어는 쏙 빼고
썸타는 감정을 짧고 재치있게
거창한 이데올로기에 청춘을 바친 5060세대에게는 ‘드러내놓고 하기 힘든 일’, 2030세대에게는 ‘간절하지만 포기해야만 하는’ 애달픈 대상. 단 두 음절로 이뤄져 있지만 듣기만 해도 ‘심쿵’하는 단어. 바로 ‘연애’다. 이러한 연애 과정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들의 감정을 잇는 핵심 매개인 연애시는 시대가 지날수록 조금씩 모습을 바꾸면서 당시의 젊은이들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여느 때보다 연애에 목마른 요즘 2030에게 연애시는 어떤 의미일까. 각자 “젊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또는 적당해서” 쓴다는 ‘요즘 것들의 연애시’를 살펴본다.
연애시도 SNS에…해시태그 타고 ‘장르’ 형성
연애에도 ‘효율’이 중요해진 때문일까. 종이ㆍ손글씨를 활용한 연애시나 편지는 많이 줄었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에 따르면 지난해 8월 2030 미혼남녀 33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응답자 중 58%(197명)는 ‘최근 1년 간 손편지를 써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손으로 쓰지 않는 주된 이유로는 ‘카카오톡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편해서(52.7%)’ ‘편지를 쓰는 것이 불편해서(16.7%)’ 등이 꼽혔다.
그렇다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저 삭히고만 있으랴. SNS는 종이와 펜을 대신해 2030세대의 연애시 장이 됐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각 대학 ‘대나무 숲(대숲ㆍ익명 소통이 가능한 페이스북 페이지)’. 등장 초기에는 주로 학내 불합리가 제보되던 대숲에서는 학기초부터 말까지 다양한 연애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상대, 혹은 짝사랑하는 상대를 향한 익명의 연애시가 봇물을 이루면서 ‘대숲문학’이라는 장르가 해시태그(#)로 묶여 공유될 정도다.
‘작품’으로서 연애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SNS 계정도 큰 인기다. SNS 특성상 이용자 간 공유가 빠르고 전달 범위도 상당한 덕에 연애시 게시물이 출판물로 발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집이 먼저 발행된 뒤 수첩과 포스트잇 등을 통해 공유됐던 과거와 순서가 정반대다. 올 1월 발간된 시집 ‘시쓰세영’이 대표적인데, 작가 김세영(27)씨는 25만 팔로워의 응원에 힘입어 3쇄를 준비 중이다.
짧고 위트있게… 외국어ㆍ명언은 NO!
이렇게 향유되는 ‘요즘 것들의 연애시’는 과거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형식부터 내용, 전달 방식까지 모두 새롭다. 쉼표와 쉼표가 행간에서 잇따라 맞닿은 만연체는 짧게는 세 단어로 압축되는 형식으로 바뀌었고, 문체법과 존비법의 변조보다는 글자 수나 제목 등에 대한 실험이 중요성이 훨씬 커졌다. 한 대형서점 관계자는 “요새 시 부문 베스트셀러는 대체로 연애시 관련 도서가 차지하는데, 그 중에서도 글이 짧고 시각적으로 단순화 된 시집이 독자들의 선택을 자주 받는다”라고 설명했다.
먼저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연애시를 쓰는 2030세대는 “명언이나 외국어를 사용하는 일은 되레 촌스러운 꾸밈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대신 상대방이 마우스 스크롤을 굴리는 속도에 맞춰 쉽고 빠르게 읽히는 글이 대세라는 설명이다. 서울 A대학 대나무숲을 통해 연애시를 게재한 김준호(가명ㆍ24)씨는 “아버지 어머니 젊을 때 연애시는 유창하고 현란할수록 박수를 받았다면, 이제는 얼마나 간결하고 재치 있게 쓰였는지가 공감의 기준”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당신’이라는 단어가 전부인 시에 ‘당신 만으로 시가 되었다’라는 긴 제목을 붙여 감동을 전한다던가(대숲 익명 작가), ‘당신은 봄 같은 사람이에요/정말/날 풀리게 하는 당신’처럼 별다른 형용사 없이 직관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시(김세영 작가, 너는 나의 봄이다) 등이 인기다.
형태적 실험도 자연스러워졌다. 시와 곁들어지는 사진이나 그래픽 등이 중요해져 실험할 수 있는 요소도 무궁무진하다. ‘또/맘이/자꾸만/간질거려/아마도네가/내마음에내려/활짝피어났나봐(페이스북 ‘시쓰는오빠’ 공동운영자 윤현식씨, 7층)’처럼 띄어쓰기를 생략하고 글자 수를 하나씩 늘려가며 모양을 잡아가는 형식의 시는 ‘5층’ ‘9층’까지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다. 웹툰ㆍ그래픽 디자이너와 협업해 만화 형식의 연애시를 쓰는 작가들도 여럿이다.
시를 전하는 상대와 감정의 성격도 과거와는 조금은 다르다. 5060세대 사이에선 이미 사랑하고 있는 애인을 향한 연애시가 주로 탄생했던 반면, ‘썸’ 문화를 적극 즐기는 2030의 연애시는 본격 연애가 시작되기 직전의 감정을 많이 다룬다. ‘시쓰는오빠’ 공동운영자 윤현식(24)씨는 “예전엔 이미 사귀고 있는데 (표현하는) 마음이 늦어서 애타고, 그래서 더 진중함이 묻어있는 연애시가 다수였다면 지금은 교제 전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의 비중이 크고 사랑 받는다”고 설명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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