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3년 장기 독재를 무너뜨린 2011년 1월 튀니지 민주화 혁명은 아랍세계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튀니지 국화(國花) 이름을 딴 재스민 혁명은 그 의미만큼이나 강력한 파장으로 아랍세계에 번졌다. 인근 이집트의 30년 독재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연달아 고꾸라졌다. 중동의 봄은 그러나 급진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의 출현으로 저지당했다. IS가 민주화의 혼란한 틈을 비집고 들어서면서 아랍 각국이 내전 상태로 빠졌다. 여기에 주요 강대국까지 개입하면서 중동 전체가 아노미 상태다. 민주화에 성공한 국가들마저 휘청거렸다. 튀니지 혁명 5주년을 맞은 지금도 중동은 갈림길에 서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 터키 현지를 찾아 아랍과 중동이 제2의 봄을 맞을 수 있을지를 점검했다.
지난달 11일 튀니지 남부 인구 4만명의 소도시 시디부지드. 아랍의 봄에 불을 댕긴 재스민혁명의 발원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시민들은 “우리도 당신들(한국)처럼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긍지를 드러내면서 “여전히 가난에 신음하고 있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일거리가 없는 청년들은 관청 앞 카페에 단체로 모여 물담배 ‘시샤’를 피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얻지 못했다는 하세프(27)씨는 “절망감에 테러단체나 마약에 빠져드는 이들도 많다”고 한숨을 쉬었다.
재스민혁명은 사회운동가들의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벤 알리 독재정권에 이어 들어선 민주 정부는 혁명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혁명 이후에도 거리 곳곳에는 노숙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난과 실업은 청년들을 이슬람국가(IS)로 유혹하는 미끼와도 같았다. 중동의 봄 기운을 이어가려는 유럽연합(EU) 등 주변국의 노력 정도가 실낱 같은 희망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희미해지는 혁명의 기억들
시디부지드 관청 앞에서 만난 인권연맹(LTDH) 회원 엔시리 부데르발라(58)씨는 2010년 12월 청과상 모하마드 부아지지(26)가 관청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하며 만들어 낸 혁명의 불씨를 생생히 기억해 냈다. 그는 “분노한 시민들이 ‘내가 바로 부아지지’라며 자유와 일자리를 요구했다”면서 “첫날에는 100명, 이튿날에는 300명, 다음날에는 1,000명이 모였고 마침내 벤 알리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부아지지가 만든 불씨는 들판의 불처럼 번졌다. 극심한 생활고와 억압통치에 눌린 민중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전국적인 봉기에도 끄덕하지 않던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당시 튀니지 대통령은 끝내 2011년 1월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튀니지 국민들은 환호했고, 재스민혁명은 인근 이집트와 리비아 등에도 혁명의 불쏘시개를 제공했다.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선사했다. LTDH 회원인 부데르발라씨는 “혁명 전에는 인권 활동을 하다 연행된 적도 있다”며 “LTDH 사무실조차 열지 못했는데 이제는 직원이 3명이나 된다”고 뿌듯해했다. 시디부지드 거리에서 만난 압델 가말(25)씨는 “독재 정권 때는 서너명만 모여도 군인이 총을 겨눠 해산시켰다”며 “지금은 이렇게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혁명의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11년 벤 알리 독재정권이 무너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이슬람주의 성향의 엔나흐다(Ennahda)당이 의석 30%를 차지해 집권했다. 엔나흐다는 튀니지의 이슬람화를 추진했다. 엔나흐다의 퇴진을 요구하는 야권과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며 경제는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노숙자들이 즐비했고, 도로에는 운전자들을 상대로 구걸하는 걸인도 늘었다. 2013년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가 결성돼 대화로 엔나흐다를 퇴진시키고, 2014년 니다튀니스당이 집권하기까지 튀니지는 정치ㆍ경제 혼란에 휩싸였다.
이러다 보니 시디부지드 주민들은 한때 부아지지를 기리며 관청 앞에 걸어 놓았던 대형 초상화와 꽃다발을 치워 버렸다. 시디부지드 시민들은 “벤 알리만 쓰러뜨리면 모든 것이 변할 줄 알았다”며 “그의 몰락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가난과 실업을 해결하지 못한 혁명
튀니지 수도 튀니스의 바르도 국립박물관에 만난 경비원 모하메드 모가디(37)씨는 지난해 3월 관광객의 비명소리를 악몽처럼 기억했다. 당시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테러리스트 2명은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들고 박물관에 난입해 관광객을 향해 난사했다. 8명이 몰살 당했다는 15평(50㎡) 규모 20번 관람실 곳곳에는 총탄 흔적이 선명했다. 모가디씨는 “테러범은 튀니지인은 살려주고 외국인만 골라 죽였다”고 했다. 희생자 22명 가운데 튀니지 경찰 1명을 제외한 21명이 독일, 일본, 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모가디씨는 “하루 최대 3,000명이 방문했지만 지금은 하루 100명도 찾지 않는다”며 “박물관뿐 아니라 주변 관광지도 초토화됐다”고 말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튀니지는 기원전 명장 한니발이 활약했던 옛 카르타고의 땅이다. 수려한 자연경관 덕분에 관광산업은 튀니지 국가경제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 관광산업은 붕괴했다. 모두가 테러 때문이다. 중동 전체로 번진 IS는 튀니지의 민주화를 두고 보지 않았다. 지난해에만 3월과 6월 테러로 관광객 수십명이 사망했다. 심지어 11월에는 대통령 경호원 버스가 테러를 당해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관광객 발길이 끊긴 관광지는 황량했다. 튀니스 도심 메디나 전통시장에서 만난 상인 오트만(52)씨는 음료와 과자가 쌓인 진열대를 보여주며 “원래 관광상품이 있던 자리인데 손님이 없어 안쪽으로 치워 버렸다”면서 “지금은 상인들을 상대로 담배와 콜라를 팔고 있다”고 했다. 이슬람 도시의 원형을 보존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메디나 시장에는 하루 수백대의 관광버스와 수천명의 외국인이 몰렸다고 한다. 오트만씨는 “지금은 겁에 질려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튀니지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초 573개의 호텔 중 9월까지 30%(192개)가 문을 닫았다. 지난해 관광객 수는 130만명으로 2014년의 53% 수준으로 떨어졌다. 호텔 매니저 에비나(34)씨는 “200여개 객실 중 20여개만 차 있다”며 “16년 동안 호텔에서 일했는데 이런 불황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관광산업이 무너지며 국가 경제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혁명 전인 2010년 12%였던 실업률은 지난해 15.3%로 올랐다. 청년(15~24세) 실업률은 37%까지 치솟았다. 물가는 연 6%씩 뛰었고 식품, 음료 부문은 9%대에 육박했다. 재스민혁명이 촉발된 배경에는 국민의 25%가 하루 약 2달러로 먹고 살았던 비참한 현실이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지만 테러ㆍ고실업ㆍ인플레이션의 3중고가 겹치며 “혁명 전보다 오히려 가난해졌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차라리 벤 알리 독재 정권이 낫다”
중동의 봄의 진원지가 튀니지가 IS의 타깃이 된 현실은 아이러니했다. 튀니지 명문 튀니스대에서 만난 트릴리 무스타파 역사학과 교수는 “일종의 체제 싸움”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민주화에 성공한 튀니지가 경제 성장도 이루면 아랍 세계에 좋은 국가모델이 된다”며 “위협을 느낀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 경제를 무너뜨려 민주화를 흔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와 가난을 구제하지 못하는 정부 때문에 튀니지 국민은 2중, 3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차라리 벤 알리 독재가 낫다’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운송업자 빌렘(25)씨는 “벤 알리는 진정한 보스였다”며 “혁명 전에는 물가도 안정되고 경제도 발전했다. 모두가 그의 명령만 따르면 됐었다”고 치켜 세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좌절한 청년들이 IS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보안컨설팅업체 수판그룹에 따르면 IS는 지난해 약 2만8,000명의 신규 전투원을 모집했다. 튀니지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6,000명을 차지했다. 대통령 직속 싱크탱크 튀니지전략연구소의 하템 벤 살렘 소장은 “절망한 젊은이들에게 매달 1,500달러(약 178만원)를 주고 다른 한 손에는 소총을 쥐어 준 후 ‘알라를 위해 싸우라’고 하면 누가 거절 하겠냐”며 “역설적으로 테러로 가난해진 튀니지가 테러범의 가장 큰 공급처가 됐다”고 말했다.
튀니스(튀니지)=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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