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누군가에게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게 꿈입니다. 그래서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되는 분들 얘기에 관심이 많아요. 어려운 형편에도 남을 돕는 일에 선뜻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돈이 아니라 의미를 좇아 힘든 일에 발벗고 뛰어든 형ㆍ누나들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물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아빠 엄마도 제가 보고 배울 수 있는 훌륭한 분들이죠.
그런데 막상 ‘성공한 사람들’ 중에 제가 어떻게 해야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지 알려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쉬워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국회의원, 판사 검사 변호사, 기업 회장님, 연예계 스타들이 있지만 그들의 소식들 중에는 ‘본받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저러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이 더 자주 들거든요. 그 이유를 일일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공감 하시죠?
그러다가 최근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어요. 그들은 다른 ‘높으신 분’들과 달리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 위치에 오른 이들이에요. 바로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와 ‘박력원순’ 박원순 서울시장입니다. 이들은 특권의식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몸을 낮췄고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권한을 활용했어요.
● 특권의식 벗어 던지고 눈높이를 낮추다
지난 20일 마산야구장. 삼성 라이온즈와 NC 다이노스의 야구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날 이승엽 선수는 연습공을 던져준 중학생 야구선수에게 사인볼을 선물했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선수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어린 학생은 아시아 홈런왕이 자신의 설익은 연습구에 대한 화답으로 사인볼을 주리라고 예상하지 않았을 테니 아마도 그 친구는 기쁨을 넘어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지난달 20일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어요. 연습을 도와준 동성중학교 선수들에게 사인볼을 선물했습니다. 키가 작은 중학생 선수를 위해 ‘쩍벌’ 자세로 사인을 하는 이승엽 선수를 보며 눈높이를 맞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대방 입장에서 행동하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그는 대기타석에 있을 때 경기 도우미인 배트보이를 위해 허리를 숙이고 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합의판정을 위해 본부석으로 향하던 심판에게 문을 열어준 뒤 뒤따라 오던 알바생에게도 친절을 베푼 것이죠.
뭐 대단치도 않은 일에 호들갑이냐구요? ‘난 선수고, 넌 학생(알바)이야’ 또는 ‘난 대스타이고 넌 평민이야’ 따위의 특권의식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인간적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 제겐 대단해 보여요. 비행기에서 승무원을 하인 부리듯 하는 대기업 임원, 백화점 종업원은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모님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이죠.
● “어린 친구 기 안 죽게”
이승엽 선수하면 빠질 수 없는 게 ‘홈런치고 고개 떨구기’죠. 2012년 한일 통산 500홈런을 쳤을 때나 지난해 KBO리그 400홈런을 쳤을 때, 올해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 개장 1호 홈런을 쳤을 때도 이 선수는 환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베이스를 돌았죠. 왜 그랬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홈런을 맞은 어린 투수가 기죽지 않게 기사 좀 잘 써달라”고 답했습니다.
최근에는 이승엽 선수가 친 타구에 투수가 맞는 일이 있었어요. 공에 맞고 마운드에 쓰러진 투수를 향해 다가간 이 선수는 허리를 숙여 괜찮은지 물어봤습니다. 저도 야구를 꽤 좋아하는 터라 경기 중계를 많이 봤는데 흔치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후배 타자가 선배 투수를 맞춘 것도 아닌데 말이죠. 까마득한 선배가 후배에게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이승엽 선수의 배려심은 우리팀과 상대팀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상대팀 선발이 왼손 투수일 때 솔선수범해 배팅볼을 던져준 거에요. 물론 왼손 배팅볼 투수가 있긴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에 도와주려던 거랍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곳곳에서 편가르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이승엽 선수가 보여주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제게는 정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걸 왜 남이 대신 해주나?”
박원순 서울시장 얘기를 해볼까요. 높으신 분들은 의전이란 것을 받는대요. 무슨 뜻인지 잘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이라네요. 다른 사전에도 ‘격식을 갖추어 베푸는 행사’라고만 돼 있을 뿐 어디에도 높으신 분들을 성대하게 환영하고 법도에 어긋나더라도 그 분들이 편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한다는 내용은 없더군요.
최근 높은 정치인 분들이 의전을 받느라 벌어진 웃지 못할 일들을 뉴스에서 봤어요. 복지관에 방문한 높으신 분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해서 정작 몸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계단을 이용해야만 했고요, 그 분을 태운 의전차량 때문에 바쁜 시민들이 불편을 겪은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박 시장은 이런 의전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박 시장이 가장 먼저 없앤 것은 차 문 열고 닫아주는 것, 비 올 때 우산 씌워주는 것, 자리에 앉을 때 의자 빼주는 것 등이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데 왜 남이 해주냐’는 거죠. 시민들의 접근을 막는 경호나 현장 방문에 동행하는 공무원 숫자도 확 줄였대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혹시 시민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입니다.
행사에서도 팔걸이 의자 대신 일반 의자에 앉고 비가 오면 우산 대신 비옷을 입으며 비행기나 기차를 탈 경우 귀빈실 대신 일반인처럼 줄 서서 타는 게 박 시장의 의전입니다. ‘서울시 의전 실무 편람’에는 의전에 대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평안, 평화스럽게 하는 기준과 절차”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누가 높은 사람이고, 누가 돈이 많고, 누가 나이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를 다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박 시장 덕분에 누구는 편하고 누구는 불편한 거 말고 모두 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알게 됐습니다.
● “이 공사는 없습니다. 제가 손해배상 당해도 좋아요”
지난 17일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인 서울 종로구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의 강제 철거 현장을 찾은 박 시장이 공사를 뒤엎었습니다. 왜 시장 마음대로 공사를 중단시키냐구요? 잘 살펴보니 그런 게 아니더군요.
이날은 원래 박 시장이 옥바라지 골목 보존 대책위원회 사람들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날 오전에 재개발사업조합 측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이 강제 철거에 나서면서 주민들과 몸싸움이 일어난 거죠.
이 소식을 들은 박 시장이 현장을 찾아 ‘서로 좋은 방향을 찾기 위해 만나기로 한 날에 이렇게 폭력을 써서 강제 철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며 서울시 관계자에게 “지금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 공사는 없습니다. 제가 손해배상 당해도 좋아요”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날 이후 박 시장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서 ‘박력원순’이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내가 시장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내 말대로 하라’는 리더는 요새 보기 드물다고 하더군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약자 보호에 쓰는 높으신 분이 많지 않대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나 도지사요’하면서 119 긴급전화 상담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름을 물어보는 분도 있고 청문회 같은 거 하면 다들 자기는 책임이 없고 다른 원인들 둘러대기 바쁘더라고요. 어느 국내 대형 로펌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 이익만 대변해 준다며 손가락질 받기도 하고요.
이런 것을 보면 박 시장은 확실히 뭔가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궁지에 몰린 약자를 위해 과감하게 결단하고 이에 대해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자세. 제가 꼭 본받아야 할 덕목이네요.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오미경 인턴PD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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