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즈는 다 떨어졌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23일 부산 사직야구장 내에 위치한 롯데 자이언츠 팬 스토어. 계산대 점원의 일이 판매 반, 사과 반이 됐다. 직원은 팬들에게“한정판매가 아닌데다 곧 구단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판매가 시작될 것”이라며 똑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점원의 일을 늘린 주범은 많이 팔라고 보채는 구단 임원도 아니요, 없는 사이즈를 달라고 떼쓰는 억지 손님도 아니다. 바로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이었다.
‘야구의 도시’ 부산의 사직구장엔 도라에몽 열풍이 불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는 올해부터 도라에몽과 손잡고 유니폼과 스냅백, 막대풍선, 텀블러 등 다양한 협력 상품을 내놨다. 시즌 초반부터 반응이 폭발적이다. 공급이 수요를 한참 못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5일 시작된 1차 판매 분이 매장 오픈 1시간 만에 ‘완판’ 된 걸 시작으로 지난 주말 KIA와의 3연전에 맞춰 들어온 5차 입고 물량까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날 매장에서도 원하는 상품을 구매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도라에몽 유니폼을 보고 경기장까지 사러 왔다”는 여성 팬 한지수(25)씨는 이날 자신에 맞는 사이즈의 상품이 동이 나 발길을 돌렸다. 한씨는 “이런 상황이라면 인터넷 구매가 시작돼도 ‘광속 클릭’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쪽에선 수시로 누군가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뒤 원하는 사이즈의 유니폼을 집어 든 이도 있었다. 계산대에 선 김영희(49)씨는 “서울에 있는 딸의 요청으로 매장을 방문했다”고 했다. 김씨는 “도라에몽 유니폼을 이 매장에서만 구입할 수 있어 딸 대신 직접 찾아왔다”며 “주말이 지나면 택배로 발송하기로 했다”고 했다.
매장 관계자는 “지금까지 이렇게 잘 팔린 기획 상품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여성과 아이 유니폼만 많이 팔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성인 남성의 구매도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며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했다. 이른바 ‘키덜트(Kidult)’들이 큰 손 역할을 한 셈이다. 구단 관계자는 도라에몽 열풍에 힘입어 기존 상품의 매출도 늘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머천다이징 상품 매출이 2배 이상 늘었다고 전했다.
‘도라에몽 열풍’뒤엔 구단 마케팅 담당자들의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롯데 김종호 팬서비스팀장은 “도라에몽의 대표색인 하늘색이 롯데의 초창기 유니폼 컬러와 같고, 친구들과 함께 꿈을 이뤄나가는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도‘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란 프로야구 출범 취지와 잘 어울렸다”며 도라에몽과 손을 잡은 배경을 설명했다.
도라에몽 캐릭터 도입 결정을 내린 롯데는 지난 9일부터 매주 토요일 홈경기 날을 ‘도라에몽과 함께하는 패밀리데이’로 지정, 선수들이 도라에몽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출전하도록 했다. 첫 날인 9일엔 ‘도라에몽 마니아’로 유명한 배우 심형탁을 시구자로 내세워 관심을 끌어 모았고, 이날 경기가 지상파 중계를 타면서 노출 폭도 커졌다.
특히 지난 24일까지 사직야구장 앞에서 개최된 ‘도라에몽 100비밀도구전’은 도라에몽 열풍에 시너지 효과를 낸 적시타였다. 롯데 구단과는 별개로 진행된 전시회였지만, ‘야구장 앞 전시회’는 야구를 보러 온 팬을 비롯한 수많은 부산 시민들은 발길을 사로잡았다.
물론 도라에몽 캐릭터 도입 과정에선 걱정과 부담도 있었다. 기존의 구단 캐릭터 활용도가 떨어질 수도 있고, 유명 캐릭터 라이선스 계약에 따른 실무적 난제들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의사결정권자가 과감한 결정으로 실무진들의 뜻에 힘을 실어 줬다. 프로스포츠 경기장이 이제 단순히 경기라는 상품만을 파는 곳이 아닌 하나의 지역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아가는 흐름을 일찌감치 읽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김팀장은 “머천다이징 매출이 높을수록 좋은 건 맞지만, 궁극적으론 야구장이 부산 시민들의 대표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는 게 더 중요한 목표”라고 했다
구단의 정성이 팬들 가슴에 닿았을까. 이날 6살짜리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은 하민수(45·부산 영도구)씨는 “지난해 야구장을 지루해 했던 아이가 올해는 무척 즐거워해 덩달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다음에 야구장 또 올까?”라고 묻자 아이의 빠른 답이 돌아왔다. “응!”
아직 ‘작전 성공’을 말하긴 이르지만 롯데는 ‘도라에몽 프로젝트’를 통해 야구와 문화의 시너지 효과를 확인했다. 김팀장은 “어쩌면 그것이 당장의 유니폼 판매 수익보다 훨씬 더 큰 소득일 것”이라며 웃었다.
부산=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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