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셜(Social)’이라는 유령이 지금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홀로’에서 ‘함께’로, ‘소유’에서 ‘공유’로, ‘나’에서 ‘우리’로, 문명의 거대한 물줄기가 어느 새 한 흐름을 끝내고 다른 골짜기 쪽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인터넷이라는 전자 정보를 사용한 관계의 그물망이 새롭게 펼쳐지고, 연결 도구의 지속적 혁신에 힘입으면서 만인과 만인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가 서서히 윤곽선을 그리고 있다. 시간을 가로지르고 공간을 뛰어넘는 ‘초연결’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우리는 ‘소셜’이라고 부른다.
소셜은 유대(bond)가 아니라 접속(access)을 지향한다. 유대는 같은 시공간에서 오랫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맺어지는, 주로 핏줄로 이어져 있기에 어느 한쪽이 일방으로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강한 연결’을 추구한다. 반면에 접속이란 비동기로 이어져서 서로 가치를 함께할 때에만 맺어지는, 공감을 잃으면 어느 한쪽이 가볍게 관계를 취소할 수 있는 ‘약한 연결’을 추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랫동안 쌓아왔던 사회관계가 한순간에 증발하는 이러한 ‘액체성 관계’를 비판하지만, ‘소셜’이란 오로지 ‘나’로 남아 있고 싶으면서 도저히 ‘함께’를 포기할 수 없는 현대인들의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지도 모른다.
2010년 초, 페이스북을 통해 두 사람이 마음을 맞춘다. 한 번도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둘 모두 좋아하는 일은 이미 잘 안다. 그 동안 책을 읽고 밑줄 쳐 둔 글귀를 페이스북에 올려서 자신을 표시하고, 그 아래 댓글을 달아 활발히 생각을 주고받아 온 까닭이다. 말은 생각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글은 말을 담기에 많이 부족하다. 마음을 통했으나 주고받음이 부족했던 두 사람은 마침내 같이 만나 마음껏 책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다. 무협의 고수들이 일합을 겨룰 기회를 찾듯. 그리고 둘이 오프 모임을 하는 김에 주변 페이스북 친구들도 같이 부르기로 한다.
SNS 책 이야기 오프라인으로 전개하다책 읽기를 좋아하는 두 청년 송화준과 이강민이 동을 뜨고, 두 사람의 소셜 친구들이 어깨를 겯어 이룩한 ‘청춘독서모임’이 거기로부터 시작된다. ‘책 읽는 지하철’의 대표이자 새로운 독서문화 설계사인 소셜 디자이너 송화준씨가 말한다.
“학교 다닐 때에도 책을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에서 책 구절이나 감상을 나누면서 자극을 받은 덕분인지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좋고 훌륭한 책이 흔히 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전에 독서 모임을 따로 하고 있었는데, 페이스북 책 친구들하고 만나서 같이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습니다. 슬쩍 이야기를 건넸는데, 엄청난 호응이 있었습니다. 모두 만나고 싶었던 거죠.”
현명한 많은 어른들은 ‘소셜’의 공허함을 경계하지만, 어떤 젊은이들은 ‘소셜’이라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적절히 도구로 써서 사회적 ‘유대’를 발명하려고 한다. 살해 도구로 쓰일 수도 있는 망치를 벽돌을 깨고 못을 박는 데 쓰고 싶어 한다. 이란 사람들이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인 워크맨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대신, 호메이니의 연설을 돌려 들으면서 진실을 확산하는 혁명의 도구로 이용했듯이, 이들은 자본이 구축해 놓은 사물의 새로운 사용법을 발견하는 자유를 실천한다. 장벽에 구멍을 내고 도로에 굴을 파서 세상의 지형을 다시 그린다. 모임을 함께 설계한 이강민씨가 말을 받는다.
“책을 읽고 노트한 책은 기억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같이 읽기는 듣고 말하면서 책에 대해 노트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혼자 읽고 노트할 때와는 다른 깊이가 생깁니다. 책을 읽고 소셜미디어에 알리고, 같이 읽고 이야기하고 모임을 다시 소셜미디어에 알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덤으로 주변에서 사회적 공신력 같은 것도 생겼습니다. ‘책 많이 읽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죠. 청춘독서모임은 한 달에 한 차례, 토요일 오후에 합정동 ‘책 읽는 지하철’ 사무실에서 모입니다. 책은 발제자가 정해 한 달 전에 알려줍니다. 가능하면 남녀가 번갈아 하도록 정하고, 책도 문학과 비문학을 교차로 진행하려 애씁니다. 친목 모임처럼 되지 않도록 주로 책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편입니다. 진행 방식은 완전히 발제자한테 맡깁니다. 발제자의 준비와 창의성에 따라 모임이 아주 다채롭게 진행됩니다.”
사진으로 음악으로 나누는 독서같이 읽기는 읽기를 해방한다. 책을 읽고 이슈를 발제하고 의견을 나누는 일을 주로 하지만, 아주 창조적인 발제도 있을 수 있다. 발제를 좇다 보면 어느 새 모두가 몸과 마음이 동시에 책을 기억하는 기적 같은 모임도 생겨난다.
‘청춘독서모임’에서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같이 읽을 때 있었던 일이다. 이 책은 감성 돋는 여행 에세이로, 특별한 이해가 필요한 책은 아니고 편안한 감상을 나누면 그만일 뿐 토론할 내용도 많지 않다. 그런데 발제자는 여행 중 찍은 사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진을 회원들한테 보내 달라고 했다. 모임 장소에 프로젝터를 설치한 후 그 사진들을 띄워놓고 돌아가면서 이야기했다. 묵은 앨범을 꺼내고 저장한 폴더를 열어서 사진을 한 장씩 넘기는 일은 인생을 다시 쓰는 일과 같다. 마음은 설레고 가슴은 두근거리는 경험이다. 이승민씨가 이야기한다.
“피아노 독서 모임도 좋았습니다. 김영옥의 ‘피아노 홀릭’이라는 책이었는데, 그 날은 피아노를 전공하는 분이 발제했습니다. 독서는 종이로 된 것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책에 담긴 여러 피아노곡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피아노로 그 곡을 연주해서 들려주었습니다. 독서는 피아노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모임을 한 후에 책에 대해 아주 관대해졌습니다. 책이 정말 좋아졌죠.” 하현주씨가 생각을 덧붙인다. “무무의 ‘사랑을 배우다’는 아주 짧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책입니다. 몇 쪽이 채 되지 않는 무한히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책을 소화하는 데에는 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선입견이 허물어지면서 저 자신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리석음을 불러들인다. 마찬가지로 책을 특정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메스꺼움을 일으킨다. 같이 읽기는 효용이나 효율을 따로 챙기지 않고, 그저 자율과 자유를 의무로 삼을 뿐이다. 같이 모여 책을 나누면서 각자 인생을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김관하씨가 이야기한다.
“김유정역 근방의 민박집에 가서 1박 2일로 밤새워 책을 읽는 기억이 납니다. 정기 모임이 아니라 번개 모임이었는데, 결국 나중에는 음주 토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 하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를 같이 읽었습니다. 가벼운 책과 무거운 책을 번갈아 하루에 읽고 이야기했는데, 이런 기막힌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예전엔 책과 함께 주는 사은품이 예뻐서 책을 사거나, 인스타그램 등에서 사진을 올리려고 책을 사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은품을 많이 주는 온라인 서점을 주로 이용했죠. 모임에 나오면서 책은 읽으려고 주로 사는 것 같습니다.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직접 책을 확인해서 사는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민혜영씨가 살짝 말을 받는다.
“안도현의 ‘연어’를 같이 읽었습니다. 함축적인 우화라서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폭발했습니다. 다양하게 살아온 만큼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서로 내밀한 이야기조차 털어놓다 보니, 그 후 같이 이야기했던 사람들끼리 친해졌습니다. 별도로 오프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지하철은 읽기 넘쳐나는 책읽기의 대지읽기는 인생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아홉 책을 읽고 나면 아홉 갈래 삶과 만나고, 그 갈래들 모두가 ‘내가 가지 않은 길’로 존재한다. 하나의 길을 정해 그대로 온전해지는 삶도 있지만, 만남을 겪으면서 분기해 전혀 다른 길로 이어지는 삶도 있다. 박주오씨가 말한다. “저는 군대에서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전역할 무렵이 되니까 시간은 엄청 남고, 할 일은 별로 없더라고요. 병영 도서관에 책이 있기에 일단 무작정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다 보니 어느새 푹 빠졌습니다. 그래서 전역한 후에 사람들하고 같이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책을 같이 읽는 이유나 동기는 정말 다양하다. 또한 모임은 그 다양성을 이자 쳐서 돌려준다. 하나의 책에 숨어 있던 가능성들이 가닥 뻗어 펼쳐지면서 만 가지 빛깔의 옷감을 짠다. 마치 인생을 여러 번 사는 것과 같다. 이동영씨가 이야기한다.
“모임에 참석하려고 처음에는 군산에서 오르내렸습니다. 독서력이 짧아 한마디도 못하고 메모만 잔뜩 하고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모임에 나오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제목만 가지고도, 표지만 가지고도, 구절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의 기운에 덧붙여 사람들 기운까지 듬뿍 받고 가는 기분이 듭니다.” 박진은씨가 덧댄다. “같이 책을 읽다 보니 문장에 예민해졌어요. 좋은 문장이 있으면 공유하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습니다. 바빠서 모임에 나오지 못하면 가족이나 친구한테 책에서 읽는 구절을 읽어주곤 합니다. 어느새 그게 취미가 되었습니다.”
책에 충실하면서도 흥미로워 만남을 기대하는 모임은 정말 어렵다. 책 내용에 집중하면 지루하기 쉽고 이야기에 홀리면 허무해진다. ‘청춘독서모임’의 활달한 균형은 아마도 책의 문화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회원들의 창조적 발상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 발상이 뻗어간 자리가 ‘책 읽는 지하철’이다. 송화준씨가 말한다. “이 모임을 모태로 하지만 ‘책 읽는 지하철’은 분리해서 운영 중입니다. 모임 회원들은 자율로 가끔씩 참여할 뿐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지하철에 올라타서 같이 책을 읽는 이 플래시몹 퍼포먼스는 현재 4000명 정도의 회원이 가입되어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은 읽기가 넘쳐나는 책들의 기름진 대지였다. 그러나 모바일 혁명 이후, 지하철은 모두가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는 책의 황무지로 바뀌었다. ‘책 읽는 지하철’은 이 공간을 책의 공간으로 되돌리려는 운동이며, 송씨가 소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네 해째 진행 중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스마트폰 탓인데, 책을 살리려는 이 운동은 스마트폰을 이용한 소셜 캠페인으로 진행되다니. 아아, 사람의 창조는 끝이 없다. 유대를 파괴하고 접속을 활성화하는 ‘소셜’을 이용해 새로운 유대를 이룩하는 혁명을 시작한 ‘청춘독서모임’에 갈채 있으라.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청춘독서모임’이 함께 읽고 싶은 청춘의 책들청춘의 의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이들에게 무엇보다 김호연의 ‘망원동 브라더스’를 추천하고 싶다. 20대부터 50대까지 망원동 옥탑방에 모인 네 남자가 서로 부딪히고 의지하면서 조금씩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감동은 준다. 이 책과 함께라면 적당한 마음가짐으로 각자 삶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3.
장 폴 뒤부아, 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김민정 옮김, 밝은세상, 2006.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 2009.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임현경 옮김, 21세기북스, 2011.
에밀 파게, 단단한 독서, 최성웅 옮김, 유유, 2014.
제프리 밀러, 연애, 김명주 옮김, 동녘사이언스, 2009.
전영수, 이케아 세대 그들의 역습이 시작됐다, 중앙북스, 2013.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2008.
김호연, 망원동 브라더스, 나무옆의자, 2014.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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