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같은 데 자주 인용되는 여론조사 중에 한국인의 타인에 대한 신뢰도와 관련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통계청이 얼마 전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5’를 보면 ‘대인 신뢰’ 항목이 있다. 통계청이 내놓은 일반 보도자료에는 세대별로 신뢰 정도가 나뉘어져 있어 전체 수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자료만 보면 2014년 조사에서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15% 수준이다.
2010년의 비슷한 조사에서 ‘낯선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답한 전체 비율은 22.3%였다. 2년 전 이 수치를 발표하면서 통계청은 이 신뢰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2개 국가(평균 32.0%)와 비교해 그 중 14위라고 했다. 1위 노르웨이는 60%였고 이어 덴마크, 스웨덴이 모두 50% 이상 수준이었다.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OECD가 낸 ‘2015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의 ‘사회 관계 지원’(2014년) 항목에서 한국이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한국은 72.37점으로 OECD(88.02점) 평균에 크게 못 미치는 꼴찌였다. 라이프스타일을 매우 광범위한 지역 규모로 살피는 ‘세계가치관조사’의 2005년 조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만하다’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 비율에서 한국(30.2%)은 중국(52.3%)이나 베트남(52.1%)보다 못했다.
한국인은 타인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자료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낯선 사람을 매우 불신하는 사회다. 대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전통사회의 해체, 급격한 경제성장과정에서 격심해진 경쟁 같은 외적인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경제 수준이 비슷한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것도 이런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을 두고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사회가 불통 문화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소통을 하지 않으니 공감할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고, 공감할 일이 없으니 타인을 믿지 않게 된다. 행복해지려면 우선 남과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왜 저토록 아파하는지를 말이다.
“용기가 없어 미뤄뒀던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펼쳤다. 읽는 고통 정도도 함께 짊어지지 못하면서 슬픔의 연대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작가들이 기록단을 꾸려 쓴 이 유가족 육성기록은 그야말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으로 빼곡했다. 팽목항의 차디찬 바다 앞에서 “이놈의 새끼가 갔나봐… 결국 갔나봐” 단말마를 토해내는 아버지와 번호가 돼 돌아온 아이의 많이 다친 모습을 말해야 하는 엄마. “자다가 새끼가 있나 방문 열어보는 게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을 때, “가장 오래 남는 게 냄새라는데, 이불에서도 냄새가 안 난다”며 울먹일 때, “너무 힘들면 아이가 신던 신발을 신고 아이가 걷던 길을 걷는다”고 고백할 때, 다음 줄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안 끝났냐고 묻는 이웃들에게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어떻게 끝내냐’고 울음을 참고 설명해야 할 때, “잊히는 게 무섭다”고, “이것마저 안 하면 다 끝났다고 인정해 버릴까봐, 그러면 내 자식한테 더 죄를 짓는 거 같아 이렇게 외치는 거”라고 호소할 때, 독서는 자꾸 지체됐다.
그 많던 슬픔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망각도 사람의 일이어서 힐난은 옳지 않다. 그저 처음처럼 다시 슬퍼하기 위한 ‘애도의 노동’이 필요할 뿐이다. 상투화하고 추상화한 슬픔의 각질을 깨고 이 슬픔을 갱신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나는 또 이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건우를 만나고 싶어. 다시 택한대도 나는 건우 엄마를 택할 거야. 그 17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시 또 기회가 생기면 건우를 또 만나 그 시간을 다시 건너고 싶다고.” 우리는 이 엄마를 위해 다시, 처음처럼, 새롭게 슬퍼해야 한다.”(한국일보 12월 25일자 36.5도 ‘이 슬픔을 갱신하기 위하여’▶전문 보기)
“이씨는 반문했다. 인양 결정, 하지 않았느냐고요? 작업하고 있지 않느냐고요? 인양은 아이를 찾는 겁니다. 가족을 만나는 겁니다. 그래야 진상 규명을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겠다고 하지 마시고, 찾고 기억하겠다고 해주세요. 가족들을 지원해온 호남신학대 오현선 교수와 제자들, 페이스북 친구 30여 명이 둘러앉았다. 잊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잊고 있었습니다.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겠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자들을 대신해 때 묻지 않은 청년들이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쉼터에서 나왔을 때 어둠에 묻힌 팽목항에서 분향소만 환하게 빛났다. ‘謹 세월호 팽목 분향소 弔’. 나는 창문 안쪽 희생자 295명의 사진과 미수습자 9명의 빈 액자를 보면서 ‘세월호가 지겹지도 않냐’는 물음을 떠올렸다. “사고일 뿐”이라고, “아이들은 가슴에 묻는 것”이라고, 그러니 이젠 잊자고 속삭이는 목소리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도 당신도 마음 한구석 불편함이 싫은 것이다. 그만 털어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같은 사회를 살던 사람이 맹골수도에 있는데, 정부가 말하는 그날의 진실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데. 4월 16일을 619일째 살고 있는 건 은화 엄마만이 아니었다. 2015년 우린 세월호에, 우리 스스로 짓고 방임한 악(惡) 속에 갇혀 있었다.”(중앙일보 12월 28일자 권석천의 시시각각 ‘팽목의 성탄, 촛불 아홉 개’▶전문 보기)
“세월호 사건은 최근 우리가 겪었던, 이제는 열거하기조차 벅찬 신문·방송과 인터넷을 가득 채운 수많은 공동체의 사건들 중 하나일 따름이고, 2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 새삼 옛 상처를 열어보고 ‘슬픔을 강요’하는 것이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그러나 앞서 길게 인용한 증언이 9·11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2004년에 있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국가 실패(state failure)에 대한 검토와 반성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음모론을 믿지 않더라도 우리의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고 구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며, 그 실패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우리는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장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9ㆍ11 사건이 테러리스트들의 책임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인용문의 핵심어는 ‘실패’나 ‘사과’가 아니라 ‘납득’일 것이다.…
우리는 슬픔과 공감과 분노를 그때 다 ‘지불’해 버렸으며, 마치 새로운 뉴스들이 이전 소식을 아래로 밀어내리는 타임라인처럼 마음의 바닥에 세월호가 가라앉도록 내버려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가 지금 침몰해 있는 곳은 겨울의 팽목항 앞바다가 아니라 그보다 깊고 차가운 우리 마음속 심연이 아닌가 한다. 가만히 있어도 슬픔에 모래처럼 씻겨나갈 유족들이 굳이 뭉쳐서 다시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그리고 청문회장에 나와서 생살을 찢는 듯한 그 순간들을 다시 견디는 이유는, 길 잃은 한풀이가 아니라 너무도 단순하고 사소한 ‘납득’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오늘 마음속의 세월호를 길어올려야 할 이유 또한 이들과 슬픔과 분노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기 때문이다.”(경향신문 12월 16일자 정동칼럼 ‘마음속 세월호를 길어올리며’▶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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