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드라이브, 딜레이 등을 들고 온 그녀가 시커먼 케이스에서 꺼낸 커다란 물체는 전자기타가 아니라 20현 개량 가야금이었다. 이루나(Luna Lee). 이제는 삼십 줄에 접어 들었지만 긴 생머리와 티셔츠 차림으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양새가 일렉트릭 기타를 거머쥔 로커와 다름없다.
외모뿐 아니다. 유튜브를 서핑하다 발견한 그녀의 동영상이 기자를 감전시켰다. 이 별난 ‘로커’는, 유튜브가 10대 기타 솔로 선율의 하나로 꼽는 ‘호텔 캘리포니아’의 애드립 연주를 고유의 산조 가야금으로 능히 재현하고 있었다. 아니, 익히 알려진 그 선율에 농현 등 가야금 고유의 시김새를 엮어 풀어내는 그 멜로디에 기자는 “짜릿하다(electrify)”라는 감상평을 마음 속에 달아두었다. 그리고 이메일로 청한 만남이 성사됐다.
그녀의 무대는 세계다. 자신의 예술을 현실에 뿌리내리게 한 것이 인터넷 공간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무대는 유비쿼터스하다고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국의 절대적 지지자들을 제외한다면 현재 팬의 7할은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일 것으로 그녀는 추정한다. 2013년 첫 앨범 ‘루나 바이 루나(Luna By Luna)’가 미국 음반사 도모 뮤직 그룹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유튜브 스타다. 그녀의 가야금에 대한 유튜브의 반응은 편파적이라 할 만큼 뜨겁다. ‘이루나’라고 검색어를 줘보자.? 동영상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그런데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곡들이 심상찮다. 지미 헨드릭스, 조세 트리아니, 스티브 바이 등 전설적 기타리스트의 명곡들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리틀 윙(Little Wing)’에서부터 ‘호텔 캘리포니아’까지 걸작들을 가야금으로 연주한다. 그녀의 가야금은 수백 년의 간극을 아우른다. “블루스 ‘리틀 윙’은 나도 모르게 몸에 배인 5음계적 어법과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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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고 있던 필연이 발현한 것일까. “가야금은 손가락으로 뜯기 때문에 ‘어택’이 강하고 그루브와 바운스가 셉니다. 셔플, 스윙, 보사노바 같은 리듬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데 강점이 있어서 이를테면 힙합처럼 비트 있는 음에도 잘 어울립니다. 넓은 폭으로 음을 진동시키는 벤딩으로 지속력 강한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요.” 벤딩(bending)이란 가야금 특유의 농현음을 전자기타식으로 옮긴 말쯤 될 것이다. 유튜브에 올라있는 곡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루나는 음악애호가이던 부모의 권유로 13세부터 가야금을 연주하고 국악중고라는 정규 코스를 밟았다. 교과과정에 따라 정악 가야금, 산조 가야금, 18현 개량 가야금 등으로 옮겨가며 성금연, 김병호, 최옥삼 등 거장들의 유파를 뗐다. 개인적으로는 담백함에 끌려 김죽파류에 집중했는데 훌륭한 스승 박현숙 덕에 즐기면서 배웠다. 모범생이었던 중고 시절, 그녀는 시키는 것을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음악을 즐긴 것은 대학 시절이다. 산조와 정악 가야금만 하다 그때 18현, 25현을 거쳐 개량 가야금으로 독주, 즉흥연주, 민요반주 등 다양한 음악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4학년 때 그녀는 금호아트홀 ‘영아티스트콘서트’ 무대에서 독주회를 했다. 그것은 이후 정악과 산조는 물론 25현으로 모듬북과 협연하고 피아노와 퓨전 작업을 한 출발점이었다. 그 무렵 스승들은 “근성 있는 연주”라며 그녀의 독자적 색채를 긍정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만의 음악에 대한 답을 지난해 2월 한양대 국악과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찾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예술에서 기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고교 시절부터 클래식적 퓨전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음악을 좋아했다. 2007년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별도의 작은 연습실을 마련한 것은 전자기타 음악에 깊이 빠져든 계기가 됐고 그 결과가 유튜브에 올린 일련의 작품이다. “(가야금 고유의) 오음계와 농현이 뉴에이지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작의 느낌에 대한 해법을 블루스에서 찾은 겁니다.” 그 간의 여정은 결국 가야금에 어울리는 음악 형식에 대한 탐색이었다.
당시에는 또 인기가요가 가야금의 감성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면 연주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2009년 한국의 기타 커뮤니티 ‘뮬(mule)’에 기타리스트 스티브 바이의 ‘텐더 서렌더(Tender Surrender)’를 가야금으로 옮겨 올렸더니 폭발적 반응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그녀는 컬트적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존재가 온라인 공간을 통해 알려지면서 미국 음반사 도모 뮤직 그룹의 제안을 받아 ‘루나 바이 루나’를 냈으나 수입은 안된 상태다. “한국서 저와 어울릴 듯한 음반사 몇 군데에 샘플을 보냈으나 감감무소식이었어요. 그러나 도모는 제안을 받은 바로 다음날 ‘잠재성을 확신했다’며 접촉해 오더군요.”
현재는 전세계 팬들의 진심 어린 반응이 최선의 보답이다. “미국 팬이 7할이에요. 그들이 저를 강력하게 지지하지요.” 지난해 독일의 듀오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티에라 네그라와 가졌던 유럽투어를 그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2월 14일 서울 합정동 폼텍웍스홀에서 함께 공연할 예정이다.
그들과의 인연은 가야금용 픽업의 협찬ㆍ홍보 작업으로 2010년 상하이에서 무대를 마련하면서 생겼다. 그러나 당시 이루나는 생면부지의 외국 예술가와의 작업이 낯설지 않았다. 도리어 유럽 기타와 처음으로 같이 한 작업이라 흥미가 컸다. “제가 ‘옹헤야’ 선율을 제시하면 그들은 예측하지 못한 코드와 선율로 답했어요. 한국이나 일본 뮤지션과 다른 색깔의 음악적 충돌이 벌어진 거예요.”
이루나의 가야금에는 산조에는 없는 속주가 있다. 듣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 힘은 때로 블루스맨이나 로커의 저돌성과 맞먹는다. 스티브 레이 본의 명곡 ‘스커틀 버틴(Scuttle Buttin)’을 보자. “기타의 좁은 지판을 가야금의 넓은 지판으로 소화해야 하므로 이전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속주 주법이 필요했어요.”
그것은 필연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을, 내가 자신 있는 악기로 해보고 싶다는 욕구에서 자연스럽게 개발된 주법이죠.” 논리적으로나 구조적으로는 새로운 접근이 아니었다. 연주자의 본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유튜브의 연주를 본 네티즌들로부터 악보를 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한다. 그러나 악보 자체가 없다. “듣고 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도 안다. 기존의 정간보나 오선보를 뛰어 넘는 가야금 기보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예요.”
4월 프랑스 등 유럽을 순회한 뒤 7월 보스턴, 10월 시카고 뉴욕 등 미국 연주와 녹음 일정을 남겨두고 있는 그녀가 ‘숙제’를 할 시간은 언제쯤일까.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 문화콘서트 난장 'Tender Surrender'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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