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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모르는 ‘n번방 그놈’ 개인정보 볼모로 “가족에 알리겠다” 협박

입력
2020.04.28 04:3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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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n번방 막아라] <상>잔인한 범행, 무딘 법

“부모가 알게 될까봐 신고 못 해… 소송지원 제도 마련을”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누가 그랬는지, 어디까지 퍼졌는지 아직도 몰라요. 처음 5개월 동안은 무서워서 집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어요.”

성착취 음란물 유포 피해자 A(19)씨는 지난해 6월 이후 영혼이 뜯겨져 나간 듯한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뉴스에서 텔레그램 대화방이란 단어만 나와도 맥박이 빨라지며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아직도 주변에서 모두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친구조차 피한다.

심심해서 무작위로 채팅 상대를 연결해 주는 온라인 랜덤채팅을 하다가 ‘그놈’을 만난 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주식을 거래하는 회사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수천 만원이 들어 있는 주식계좌를 보여주면서 “고액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신체를 찍은 사진이나 영상만 보내주면 한 달에 400만원씩 주겠다고 꼬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A씨는 얼굴이 나오지 않게 신체 사진 몇 장을 보냈다. 곧바로 A씨 계좌에 400만원을 송금했다는 사진이 도착했다. 그땐 몰랐지만 조작된 사진이었다. 그놈은 “주식으로 입금돼 실제 계좌에 들어오는 건 4, 5일 걸린다”며 A씨에게 더 수위가 높은 영상을 요구했다. 선물로 최신 스마트폰을 보내겠다며 집 주소와 이름도 알아 갔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A씨의 계좌에는 약속한 돈이 입금되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따졌더니 그놈은 “영상을 다 갖고 있고 집 주소도 아니까 기어오르지 말라”며 돌변하며 협박했다. 두려움을 느낀 A씨는 그 놈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휴대폰이 울리거나 초인종 소리만 나도 그놈이 찾아온 건 아닐까 공포에 사로잡혔다. 한 달 넘게 집요한 협박을 하던 그놈은 “영상을 다 모았다”며 대화방을 ‘폭파’했지만 A씨는 신고도 못하고 계속 벌벌 떨었다. 자신의 영상이 유포되거나 기록이 남는 게 무서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놈이 누구인지도 여전히 모른다. A씨는 “처음 채팅앱에서 만난 목적이 좋지 않아서 끊임없이 발목을 잡히면서 피해를 당했다”고 하소연했다.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25)과 그 일당이 붙잡히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뤄지는 디지털성범죄의 잔인함이 드러났어도 피해자들에게는 그걸로 끝이 아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신의 영상이 어딘가에서 떠돌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25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이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선 이후 이달 22일까지 검거한 피의자는 340명이다. 이중 10대(106명)와 20대(142명)가 73%다. 확인된 성착취물 피해자도 10대(26명), 20대(17명)가 가장 많다. 하지만 형사사법 전문가들은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신의 개인정보를 알고 있다는 두려움에 다수의 피해자들이 성착취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여론이 강한 지금도 쉽사리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해 스무 살인 B씨도 그렇다. B씨는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의 시초로 알려진 ‘n번방’ 운영자 ‘갓갓’(텔레그램 닉네임)의 피해자다. 익명 SNS에 얼굴을 가린 채 신체 사진을 올리는 계정을 운영했던 B씨가 경찰을 사칭한 갓갓에게 주소와 개인정보를 알려준 게 화근이었다. 갓갓은 B씨의 삶을 움켜 쥐었다. B씨는 “허튼 짓을 하거나 도망치려 하면 주변 사람이 다칠 거라고 협박하면서 구글, 카카오톡, 트위터 계정도 빼앗아갔다”면서 “스마트폰 GPS를 이용해서 위치추적을 했고 답장하지 않자 ‘니 가족도 사람 보내서 찢어놓겠다’고 협박을 했다”고 말했다.

협박에 못 이긴 B씨는 수많은 사진과 영상을 갓갓에게 보냈다. 갓갓은 수천 명이 있는 n번방에 자료들을 유포했다. 회원들은 온갖 희롱을 퍼부었다. 어떤 이들은 B씨에게 또 다른 사진을 요구하면서 2차 가해도 범했다. B씨는 “성인사이트에서 판매되는 내 사진이 또렷이 기억 난다”며 “그만 찾아보게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무력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이들이 부지불식 간에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또 다른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C씨는 어느 날 SNS에서 쪽지를 받았다. 본인의 나체 사진이 떠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얼굴은 자신이었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진이었다. 알고 보니 음란 사진에 C씨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음란물이었다. C씨는 “내 페이스북에 있는 사진을 가져간 것을 보면 주변 사람일 텐데 전혀 감이 안 온다”며 “어딘가에서 수많은 이들이 내 합성 사진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치민다”고 말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찾아오는 피해자들 중 10여 년 전에 사건이 발생한 경우도 있는데, 그런 영상의 조회수는 백만을 넘어설 정도”라며 “어린 피해자들은 부모가 알게 될까 봐 대응을 못하고 있어 그들이 형사소송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하늘 기자 ahn708@hankookilbo.com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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