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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 유심 1개당 5만원 드려요”… 알뜰폰이 대포폰 공장으로

입력
2019.11.19 04:40
수정
2020.06.09 11:09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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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8> 범죄의 필수품 ‘대포폰’

대포유심 대포폰 유통조직. 그래픽=송정근 기자
대포유심 대포폰 유통조직. 그래픽=송정근 기자

“급전이 필요하신가요? 선불폰 개통 시 현금 지급합니다. 신용불량자, 회생자, 미납자, 연체자 누구나 가능!”

발길에 채이는 전단지 같은 데서 흔히 보는 광고다. 온라인 시대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흔하다. 선불 유심을 가져다 주면 그 자리에서 현찰 5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이다.

선불폰은 일정 금액을 미리 충전한 만큼만 쓸 수 있는 휴대폰이다. 알뜰폰(MVNO)통신사를 이용하면 1인당 최대 4개의 번호를 개통할 수 있다. 알뜰폰 통신사만 70여개가 넘는 요즘, 한 사람 명의로 수십~수백 개의 번호를 개통할 수 있다. 큰 힘 안들이고 요긴한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종의 ‘현금자판기’다. 설정된 금액만큼만 쓸 수 있으니 ‘요금 폭탄’ 걱정도 없다. 다만, 그렇게 개통한 번호가 어디에 쓰일 지에 대해선 눈 감아야 한다.

신용불량자 정금자(가명)씨도 그랬다. 광고 전단지에 적힌 연락처를 보고 만난 김모(41)씨는 능수능란했다. 별 의심 없이 선불폰을 잘 내놓는, 흔히 ‘잘 뚫린다’는 대리점 몇 곳을 딱 찍어줬다. 김씨 스스로가 통신사 대리점을 운영했으니, 절차나 방법에 정통했다. 김씨가 찍어준 매장에 가서 4개의 선불폰을 구입, 개통한 것이 확인되자 그 즉시 ‘개당 5만원씩, 20만원’이 정산됐다. 정씨는 그 뒤 급전이 필요해질 때면 몇 번 더 김씨를 찾았다.

액수가 적어도 돈이 급한 사람엔 돈 자체가 기쁨이다. 몇 번 다녀갔을 뿐인데, 어느 샌가 정씨 명의의 선불폰은 무려 200개에 육박하고 있었다. 선불폰 특성상 개통할 때 알림이, 월말에 요금 고지서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씨 명의의 선불폰, 일명 ‘대포폰’은 조직폭력배, 불법 대부업자, 인터넷 도박업체 운영자 등의 손으로 넘어갔다.

◇대구에 자리잡은 ‘전국구 대포폰’ 사업가

김씨는 대구에 근거지를 둔 대포폰, 대포 유심계의 ‘큰손’으로 군림했다. 김씨는 광고를 보고 찾아온 이들을 차근차근 안내했다. 한 대리점에서 3~4개씩, 모두 9~10개의 선불유심을 만들어오면 김씨는 개당 5만~6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한나절 대리점을 돌면 50만원 정도 벌게 되는 셈이니 큰 저항은 없었다. 김씨는 대포 유심 1개당 15만원씩, 중고 휴대폰에 유심까지 끼운 소위 ‘풀세트’는 30만원까지 가격을 올려 중개업자들에게 되팔았다. 수입은 짭짤했으나 의심도 피해야 했다. 자신의 대리점을 활용하되, 내연녀나 다른 사람들 명의로 새 대리점을 차리거나 뜻이 통(?)하는 점주와 연결하는 등의 수법을 쓰기도 했다.

김씨 뒤에는 범죄조직과 연결된 중개업자 박모(40)씨가 있었다. 박씨는 대포폰 중개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 집 대포폰이 잘 안 막힌다’ ‘한번도 한 잡혔다더라’ 같은 풍문이 나돌았다. 그러니 단골 고객도 많았다. 박씨는 한 달에 두 번씩 대포유심, 대포폰을 김씨로부터 넘겨받아 자신의 고객들에게 팔았다. 비밀 SNS를 통해 접촉한 구매자들이 주 고객이었다. 배달도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이용, 수사기관의 눈을 피했다. 김씨는 박씨를 통해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근거지인 대구를 넘어, 청주ㆍ대전ㆍ 파주 등으로 영업 지역을 확장해나갔다.

알뜰폰 통신사도 가만 있었던 건 아니다. 신분 확인을 강화하기 위해 영업 직원들에게 “신분증의 발급일자를 불러달라”고 재확인토록 했다. 김씨와 박씨는 선불폰 개통 때 명의자의 주민등록증을 찍은 ‘컬러 사본’까지 추가, 오히려 가격을 올려 받았다. 대포폰에 명의까지 빌려줄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분증을 노출시키는 것쯤이야 큰 거부감이 없었다.

대포폰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범죄자들이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다 쓰는 휴대폰이다. 휴대폰이 대중화된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대포폰은,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대포 유심’으로 진화했다. 그 가운데 개통도 쉽고, 요금만 충전하면 명의자도 모르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선불 유심’은 더 인기를 끌었다.

2012년 본격 범행에 나선 김씨와 박씨는 2017년 경찰에 검거될 때까지 이런 방식으로 1만680대의 대포유심과 대포폰을 만들어 전국에 유통시켰다. 그렇게 얻은 수익은 무려 89억원에 달했다. 재판에 넘겨진 김씨와 박씨는 1심에서 각각 징역 8월, 징역 1년2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경찰이 밝혀낸 이들의 범행 전모 또한 ‘빙산의 일각’이란 지적이 나온다. 거래 대금을 ‘대포 통장’으로 받아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워서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시작한 대포폰 수사

“수사는, 2016년말 시작했습니다. 국정농단 사건이 연일 언론에 나왔는데, 그 중에 박근혜 정부 핵심인사들이 대포폰을 쓴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정부 인사들도 쓴다는 이 대포폰, 대체 누가 만들어내는지 궁금했습니다.”

당시 충북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이었던 안현민 경위가 가진 궁금증이었다. ‘모든 범죄의 시작과 끝에 대포폰이 있다면, 대포폰을 막아버리자’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마침 믿을만한 정보원으로부터 ‘전국 단위 대포폰 큰손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기도 했다.

수사는 길었다. 구매자에서 소매상, 다시 도매상으로 역추적해서 올라가는 데만도 다섯 달이 걸렸다. 그렇게 쫓은 끝에 김씨의 대구 본거지를 찾아내 일주일간 잠복한 뒤 급습했다. 하지만 김씨가 더 빨랐다. 낌새를 눈치채자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잠적해버렸다.

안 경위는 하늘이 노래졌다. 명의 대여자 수천 명의 가입신청서를 받아 분석한 것은 물론, 10만여개의 전화번호를 비교 대조한 작업 끝에 대포폰 의심 번호까지 뽑아둔 상태였다. 안 경위는 “데이터 양이 엄청나서 프로그램 돌리던 컴퓨터가 몇 번이고 멈춰버릴 정도였다”며 “그 자료들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다시 수사가 이어졌다. 잠적한 줄 알았던 김씨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새 대리점을 열어 다시 영업하고 있었다. 이번엔 놓칠 수 없어 확증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팀원 15명이 2인 1조로 짝을 지어 일주일에 3번씩 청주에서 대구로 출근했다. 꽤 오래 지켜보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대리점엔 사람보다 퀵 오토바이가 더 자주 드나들었다. 유동인구가 많아 장사에 한창 열을 올려야 할 주말엔 정작 가게 문을 닫았다. 혹시 멀쩡한 대리점을 겁 없이 ‘대포폰 거래 본부’로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압수수색을 하자 의심은 사실로 확인됐다. 수천 여대의 대포유심과 대포폰이 사무실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리점을 정식으로 열어두고 나름대로는 조심한다고 영업을 했지만 부랴부랴 거래 본부를 옮기느라 사무실 한 켠에다 그 이전에 만들어둔 대포폰들을 잔뜩 쟁여두고 있었던 것이다. 안 경위는 “원래 본거지를 처음에 압수수색하는 데 성공했다면, 신분증 같은 피해자들 개인정보 자료도 훨씬 빨리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이 수백여 개 개통 가능

알뜰폰 업계의 ‘선불폰’ 신규 가입자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2019년 5월 기준 알뜰폰 전체가입자 800만여명 중 선불폰 가입자는 374만여명에 이른다. 전체 가입자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다. 미리 요금을 충전해서 쓰는 선불폰은 원래 국내에 단기간 머무는 외국인들을 주 대상으로 기획된 상품이었다. 후불폰에 비해 개통이 훨씬 쉽다 보니 실제로는 대포폰으로 악용되고 있다.

알뜰폰 업계의 허술함도 이를 부추긴다. 업체들 입장에서는 가입회선을 최대한 늘리는 게 유리하다. 1인당 최대 4개 회선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존 거대업체 SKT, KT, LG U+ 3사의 경우 1인당 최대 회선을 2개로 제한해둔데다 통신사간 번호 조회가 가능해 개통 즉시 같은 명의자의 다른 휴대폰으로 안내 문자 등이 전송된다.

그러나 이들의 통신망을 빌려 쓰는 알뜰폰 통신사들은 통신사 간 번호 개통 현황 조회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선불폰의 90%이상이 알뜰폰 업계에 쏠려 있다. 특히 ‘선불 유심’은 손톱만한 칩 형태기 때문에 사고 팔기 쉬운데다 범죄 악용 소지가 특히 높다.

안 경위는 “알뜰폰 선불유심이 대중화되며 대포폰을 만들기가 이전보다 쉬워진 것이 사실”이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계 당국이 나서 불법 선불폰 유통 단속을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뒤이어 그는 “명의만 넘긴 선불폰이 대포폰으로 둔갑해 범죄에 쓰여도 정작 명의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가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당부했다.

◇진화하는 대포폰 수법

안 경위의 수사기법을 배운 후임들은 지난 4월 수백여대의 대포폰을 성매매업자들에게 유통한 A씨 등 일당을 검거했다. 수사 결과 이들은 신종 수법을 썼다. 알뜰폰 업체의 개통 프로그램을 통신사 대리점주로부터 사들여서 대포 유심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대리 명의자들의 인적 사항, 신분증, 가입등록확인서 등을 업로딩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승인하는 방식이었다.

이 사건을 맡았던 충북경찰청 광역수사대 엄동식 경사는 “알뜰폰 통신사들 중에서도 특히 영세한 업체의 경우는 개통 프로그램 관리가 허술한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며 “이런 맹점을 노리며 하루가 다르게 범행 수법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대포폰 업자에게 명의를 빌려줘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전기통신사업법은 “누구든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해 타인의 통신을 매개하거나 이를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해두고 있다. 휴대폰이나 유심을 자신이 쓸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개통해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판매했다면 ‘불법 거래’로 간주돼 1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간에는 이 부분에 대한 처벌이 미약한 편이었다. 명의를 빌려줄 정도의 곤궁하다는 점, 대포폰에 대해 잘 몰랐다는 점, 어떻게 보면 피해자인 측면도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하지만 대포폰의 위험성이 커질수록 결국 이들 또한 처벌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안 경위는 “지금까지는 선의의 피해자를 걸러내기 위해 고의성 여부를 따지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명의 제공자들도 처벌 대상”이라며 “당장의 현금이 급하다고 해서, 이런 류의 불법 행위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청주=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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