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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모습. 뉴스1
의사 사회에 또 블랙리스트가 판치고 있다. 최근 서울대 의대 본과 3, 4학년 일부가 새 학기 강의에 참여하자 복귀자 실명과 학년이 표기된 명단이 의사 전용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댓글은 처참했다. ‘매국노’ ‘친일파’ ‘병신’이라는 비난은 물론이고 ‘잡아 족쳐야 한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인제대 의대에서도 휴학 관련 학칙에 따라 제적 위기에 몰린 학생들이 복귀 의사를 밝히자 어김없이 블랙리스트가 돌았고 결국 제적을 감수하며 복학을 철회했다고 한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지난해 2월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와 의대생이 병원과 학교를 뛰쳐나간 지 어느덧 1년. 그동안 수차례 목격했던 장면이기 때문이다. 단일대오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일 때마다 의사들은 이탈자를 색출해 공격했다. 병원에 남은 전공의와 전임의 명단이 유포됐고,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파견된 공중보건의와 군의관 명단이 유출됐으며,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의사 명단이 블랙리스트에 추가됐다. 국민을 ‘개돼지’라 멸칭하며 ‘더 죽어 나가야 한다’고 쓴 패륜 글도 있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극심한 조리돌림을 당한 의사를 만난 적이 있다. 인격이 말살되고 영혼이 파괴됐다고 토로했다. 지금도 정신과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고통받고 있다. 병원에 복귀했다가 사이버불링을 당해 다시 떠난 전공의도 많다. 수련을 시작하고 싶지만 블랙리스트가 무서워 돌아가지 못한다고 울먹이며 병원 측에, 지도 교수에게, 심지어 보건복지부에 도움을 요청한 전공의도 있었다. 이러한데도 ‘자발적 사직’ ‘자발적 휴학’이라고 말할 수 있나.
집단행동 불참 의사 2,974명의 명단을 작성해 유포한 사직 전공의 류모씨에 대한 첫 재판이 20일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다시 등장한 의대생 블랙리스트를 보면서 의사계의 반성과 자정을 더는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일이 거리낌 없이 반복되는데, 의사 사회에선 문제 해결은커녕 내부 비판 목소리조차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피해자 보호 노력도 거의 없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의사가 ‘블랙리스트 온상인 의사 커뮤니티를 없애야 한다’, ‘경찰은 왜 수사를 제대로 못하냐’고 성토했다. 블랙리스트는 엄연히 범죄다. 범죄는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사회적 문제가 된 의사 커뮤니티는 법적 처분 이전에 의사들이 앞장서 퇴출하는 게 순리다.
의대 증원을 반대하든, 휴학을 하든, 사직을 하든, 의업을 아예 때려치우든, 그 무엇이든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이어야 한다. 의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병원으로 돌아오고 싶은 사람을 더는 공격해선 안 된다. 최소한 범죄자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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