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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샛의 시간

입력
2024.10.30 18: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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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가을이 떠나기 전에 단풍잎 하나 가슴에 품어야겠다. 꽃보다 아름다운 새빨간 단풍을.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을이 떠나기 전에 단풍잎 하나 가슴에 품어야겠다. 꽃보다 아름다운 새빨간 단풍을. 한국일보 자료사진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차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드러누웠다. 단 몇 초 만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 새벽, 경기 포천이 내뿜는 겨울의 입김에 잠시 긴장했다. 생각해 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미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고, 나뭇가지마다 활짝 핀 눈꽃도 (사진으로) 보았다. 시골 밭고랑엔 서릿발도 돋았을 게다. 옛말에 “무서리 세 번에 된서리 온다”고 했다. 서리에 물기가 빠지면 날이 추워진다.

숲속 푸르른 윤슬을 만끽하며 회사 행사장에 도착했다.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읊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붉구나.” 곱게 물든 가을에 푹 젖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눈 가는 곳마다 단풍이 붉게 노랗게 말갛게 타고 있었다. 이럴 때 꼭 필요한 건 접두사 '새, 샛, 시, 싯'. 글자 하나를 더하는 순간 색은 더욱 산뜻하게 빛날 것이다.

‘새’와 ‘샛’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둘 다 색을 표현하는 형용사 앞에 붙는다. 새빨갛다 새까맣다 새하얗다 샛노랗다 샛말갛다…. 새와 샛 덕에 색이 더욱 짙고 선명해졌다. 빛깔도 새뜻하고 맑아졌다. 새빨갛다는 진하게 빨갛고, 샛말갛다는 색이 아주 산뜻하게 맑다는 뜻이다. 새하얗다는 아주 하얗고, 샛노랗다는 노랑보다 훨씬 더 노랗다.

색의 느낌을 더하겠다고 새와 샛을 막 붙이면 안 된다. ‘새’는 뒤에 오는 말의 첫소리가 안울림소리(무성음)일 때, ‘샛’은 울림소리(유성음)일 때 쓸 수 있다. 울림소리는 'ㄴ ㄹ ㅁ ㅇ'. 예전 글에서 ‘나라마음’ 혹은 ‘노랑머리’로 울림소리를 머릿속에 넣어두길 권한 적이 있다. 노랗다와 말갛다는 울림소리인 ㄴ과 ㅁ으로 시작해 ‘샛’이 붙었다.

'시'와 '싯'도 마찬가지다. 안울림소리 앞에는 ‘시’, 울림소리 앞엔 ‘싯’을 붙인다. 시뻘겋다 시퍼렇다 싯누렇다 싯멀겋다처럼. ‘새’와 ‘시’ 쓰임의 구분법도 알아봐야겠다. 낱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새빨갛다 새까맣다 새파랗다 등 '새' 뒤엔 양성모음의 색깔이 온다. '시' 다음에는 시뻘겋다 시꺼멓다 시퍼렇다처럼 음성모음의 색깔이 붙는다. 샛노랗다 샛말갛다와 싯누렇다 싯멀겋다도 어렵지 않게 구분해 쓸 수 있겠다.

낙엽 깔린 폭신한 길을 걷다 보면 한순간 시름도 날아간다. 새파란 하늘, 샛말간 바람이 이마에 닿으면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절로 읊어질지도 모른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노경아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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