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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도 이제 '세계 언어'

입력
2024.10.16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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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견식
신견식번역가·저술가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15일 시민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책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15일 시민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책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한글날 이튿날,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많은 사람이 기뻐했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과 어문학 분야 종사자나 전공자에게는 더욱 뜻깊었다. 스웨덴 아카데미 노벨위원회는 한강이 역사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인간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문학상을 받는다고 발표했다. 공식 영문 홈페이지는 인간의 취약함(스웨덴어 원어 människans sårbarhet)을 인간 삶의 연약함(fragility of human life)으로 영역해 이를 중역한 한국어 기사도 후자가 많다.

실은 원어대로 '인간의 취약함/취약성'이 더 어울린다. 공격받거나 위태로워질 수 있는 취약함(스웨덴어 sårbar, 영어 vulnerable)은 쉽게 부서지거나 깨지는 연약함(fragile)과는 좀 다르다. 한국 현대사의 폭력을 비롯해 인간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파고드는 작품에는 취약이 더 알맞다. 물론 둘이 늘 갈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취약함(human vulnerability)이 딱딱하게 들려서 좀 부드럽게 말을 돌린 듯싶다. 촌각을 다투는 보도에서 이런 중역이야 어쩔 수 없다.

한강의 작품은 몇몇 언어에서 영어 중역도 있다가 이제 한국어에서 곧바로 옮기는 경우가 늘었다. 높아진 한국어의 위상도 한몫한다. 노벨문학상 관련 덴마크어 기사도 중역 얘기가 있다. 덴마크에서 한강은 대개 영어나 스웨덴어 중역이다. 기사에서는 그 점이 아쉽다면서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한국어 같은 세계어(verdenssprog)를 옮길 사람이 왜 덴마크에 하나도 없느냐는 것이다. 세계어(世界語, world language)는 국어사전에 여러 나라에서 공통으로 쓰려고 만든 에스페란토 등 '국제보조어'와 동의어로 나오지만, 사회언어학적으로는 세계 공통어인 영어를 비롯해 유엔 공용어(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처럼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일컫는다.

이런 언어들만 된다고 딱 정해진 것은 아니기에 역사적으로는 라틴어, 현재로 치면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는 독일어 등도 되겠다. 넓게 보면 일본어도 낄 법하다. 그렇다면 대중문화 등에서 영향력이 있고 이제 여러 나라에서 외국어로 배우는 한국어도 세계어에 들어갈 만하다.

많은 한국인은 흔히 한국어를 소수 언어라 일컫는다. 대개 소수 언어(minority language)는 존속이 위태로운 언어나 어떤 나라의 소수민족이나 이민자가 쓰는 언어를 일컫지만, 상대적 관점이라서 예컨대 프랑스어가 공용어인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영어조차 소수 언어인 셈이다. 한국에서는 영어 빼고는 외국어 학습이나 번역의 관점에서 '스페인어 같은 소수 언어'라는 표현도 대충들 쓴다. 영어나 프랑스어 같은 언어와 세계적 차원에서 견주면, 모어 인구 8,000만 명으로 세계 수천 개 언어 중 십몇 위 안에 들어도, 한국어도 소수 언어로 느낄 수는 있다.

누구에겐 아직 소수 언어지만 누구에겐 이제 세계어라니 역시 혼돈의 한국 언어답다. 한류 인기에다가 노벨문학상 덕에 한국어의 세계적 지위가 더 올라갔다고 뿌듯하게 여겨도 물론 좋다. 그렇다면 문을 닫기보다 여러 면에서 포용적인 언어가 돼야 진정한 세계어라고 할 만하겠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우리말이 이제 변방에서 우리끼리만 통하는 게 아니고 더 넓은 세계를 이어주는 구실도 한다는 걸 한결 새로이 깨닫는 계기도 될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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