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578돌 한글날] Sale, Friends, Surprise... 나들이 온 두 살배기 눈엔 온통 '알파벳'만 가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578돌 한글날] Sale, Friends, Surprise... 나들이 온 두 살배기 눈엔 온통 '알파벳'만 가득

입력
2024.10.09 00:00
8면
0 0

[어린이 눈에 비친 외국어 남용]
나들이 3시간 동안 외국어 160개 접해
외국어 과노출 아동, 문해력 저하 우려

8일 최군이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다. 전유진 기자

8일 최군이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다. 전유진 기자


"엄마, 쇼핑몰 키즈카페 갈 거예요?"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서울의 한 쇼핑몰에서 엄마 손잡고 나들이 나온 최모군을 만났다. 두 살배기 최군은 쇼핑몰, 키즈카페 등 외래어를 잘도 발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 자주 찾는 주변 아동 시설엔 외래어와 외국어 안내 간판이 가득했다. 편의점 문엔 할인을 알리는 'SALE' 표시가, 근처 어린이 공간엔 'KIDS PLAY GROUND'가 번역조차 없이 벽에 붙어 있다. 젤리 스무디, 바스켓볼, 무빙워크. 알파벳 아닌 한글로만 표시해 주면 고마울 정도다.

이날 본보는 최군 모자와 함께 약 세 시간 동안 어린이 시설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이 세 시간 동안 최군이 아장아장 걸으며 마주쳐야 했던 외국어·외래어는 모두 160여 개. 엄마 신모(34)씨는 "평소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던 거리였는데, 주의를 기울여 세어 보니 생각보다 많은 외국어가 눈에 들어왔다"며 "외국어 교육 걱정을 했었는데, 이제 보니 한글부터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8일 최군이 가족과 함께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쇼핑몰을 방문했다. 전유진 기자

8일 최군이 가족과 함께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쇼핑몰을 방문했다. 전유진 기자

9일은 한글의 578번째 생일이다. 60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정작 2024년 한국의 거리에선 순우리말이나 한자어보단 서양에서 온 외국어와 외래어가 더 환영받고 있다. 한창 한국어를 배우고 한글을 습득해야 할 아이들이 외국어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면 문해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잦은 외국어 노출→문해력 저하

8일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서점 내 어린이 도서 매대. 전유진 기자

8일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서점 내 어린이 도서 매대. 전유진 기자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어왔지만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고 이미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을 일컫는다. 라디오, 라면, 컴퓨터 등이 예다. 반면 영화, 우유로 대신할 수 있는 무비, 밀크 등은 외국어다. '어린이 카페'로 대체 가능한 '키즈 카페'의 경우 외국어와 외래어가 혼용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대신할 말이 있음에도 베이커리, 사운드북과 같이 외국어가 흔히 쓰이는 게 현실이다.

어린 나이에 잦은 외국어에 노출되면 청소년기 이후 한글 문해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정아 국제대 유아교육학과 교수는 "영유아부터 7세까지는 한글과 한국어를 가장 많이 익히는 시기"라며 "이때 외국어를 먼저 접하면 한국어에 흥미와 관심이 떨어지고, 이것이 지속될 경우 언어 발달이 더뎌지고 문해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교육 현장에선 이미 학생들의 낮은 문해력을 실감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한글날을 맞아 발표한 '학생 문해력 실태 인식조사'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 교원 5,800여 명 중 "학생 문해력이 과거보다 나빠졌다"고 답한 비율은 91.8%에 달했다.

이야기책·장난감도 외국어

8일 서울 동대문구 서점 내 장난감 매대. 전유진 기자

8일 서울 동대문구 서점 내 장난감 매대. 전유진 기자

실제 이날 기자가 찾은 서울 동대문구 서점엔 단순한 이야기책에도 외국어가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놀이책, 색칠같이 우리말로 쓸 수 있는 간단한 표현도 놀이북, 컬러링 등 단어가 쓰였다. 장난감 매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퀴시' '메이킷' '매직 글리터' 등 장난감 상자 겉면엔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 공간을 강타한 외국어의 무자비한 공세에 학부모와 교사들은 난감함을 감추기 어렵다. 다섯 살 딸을 둔 박모(36)씨는 "아이를 데리고 자주 방문하는 장소인 아웃렛, 키즈카페, 쇼핑몰 등 장소들의 명칭이 전부 영어여서 아이가 뜻을 물어보면 최대한 번역해서 알려줘야 한다"며 "너무 어린 나이부터 영어를 접하는 친구들이 한국어 발음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서점에서 만난 국어강사 김모(48)씨도 "지금은 영어가 너무 많이 쓰여서 제목만 봐선 무슨 책일지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10년 전과 비교해 학생들의 문해력이 저하되고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군의 반창고에도 한글이 아닌 영어가 쓰여 있다. 전유진 기자

최군의 반창고에도 한글이 아닌 영어가 쓰여 있다. 전유진 기자

전문가들은 우리말 사용을 장려하기 위한 가정, 교육기관, 정부 차원의 전방위적 노력을 강조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이미 수입 식품은 한글 정보 표시 규정이 있는 만큼 어린이를 위한 물품 등에도 관련 정책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외국어 사용을 줄인 제품을 찾기 위한 부모의 노력에 더해, 한국어 교구를 채택하는 교육기관의 노력도 동반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유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