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24 홈리스 월드컵 폐막]
9월 21~28일 한양대, 아시아 최초·FIFA 첫 공인
"사각지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사랑… 혼자 아냐"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걸 우리 선수들이 앞으로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한별 홈리스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
고국의 전쟁을 피해 한국에 발을 디딘 난민 신청자, 보육원에서 나고 자란 자립준비청년, 소년 보호시설에서 온 위기 청소년까지. 언뜻 접점이랄 게 없어 보이는 8명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한데 모였다. 전 세계 '홈리스'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풋살 월드컵 참가를 위해서다. 대회 마지막 날인 28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대운동장에서 만난 이한별 '홈리스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귀한 기회"라며 "대회 이후에도 선수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소중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홈리스 월드컵'은 홈리스월드컵재단과 사단법인 빅이슈코리아가 공동 주최한다. 2003년부터 개최돼 코로나19가 유행한 시기를 제외하면 올해로 19번째다. 21~28일 한국에서 열린 이번 월드컵에는 전 세계 38개국 남녀 52개 팀이 참가했다. 팀당 선수는 8명이며, 전·후반 각 7분씩 4대4 풋살 방식이다. 최대한 많은 선수가 경기에 뛸 수 있게끔 선수 교체엔 제한이 없다. 홈리스 월드컵을 아시아 국가가 개최한 건 최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처음 공인한 대회이기도 하다.
목표는 분명하다. 대회명에서 알 수 있듯, 누구나 주거권을 보장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 대회 기간 찾은 현장은 나날이 축제 분위기였다. 국적·피부색이 다른 생면부지 선수들이 축구공으로 하나가 됐다.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 할 것 없이 양 팀 선수와 코치들이 손을 맞잡고 앞으로 뛰어나가는 대회 특유의 세리머니도 빼놓지 않고 선보였다.
홈리스(homeless)는 문자 그대로 '집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해야 한다는 게 전 세계적 추세다. 이를테면 집이 있지만 이사가 잦은 등 주거 형태가 불안정하거나, 심리적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까지 아우른다.
방황 소년도, 은둔 청년도... 새 삶 그리게 해준 축구
한국 대표팀에도 다양한 '홈리스'들이 모였다. 김성준(25)씨는 부산에서 온 자립준비청년이다. 김씨가 다니던 보육원엔 그를 친아들처럼 아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이 나무는 단풍나무고, 저 나무는 벚꽃나무란다." 어린 김씨의 손을 잡고 보이는 식물의 이름을 일일이 알려준 은사 영향을 받아 김씨는 조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2019년, 선생님 부고가 들렸다. 공교롭게 그즈음 식물 알러지 질환까지 도졌다.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진 스물한 살 김씨는 방문을 걸어잠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김씨를 끌어낸 건 어릴 적 친구였다. 우연히 옆집에 이사 온 친구는 틈만 나면 대형 냄비에 김치찌개나 라면을 잔뜩 끓여 현관문을 두드려댔다. "니 왜 이러고 있는데? 쫌 나가라. 나가서 좋아하는 거 해라."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축구가 떠올랐다.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운영하는 '만사소년FC' 경기에 나가 득점에 성공하며 축구가 주는 기쁨을 만끽했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다.' 차근차근 세상 밖으로 나온 김씨는 두 달 합숙을 거쳐 대표팀 주장으로 발탁됐다.
막내 남제냐(16)군은 대표팀 '재간둥이'로 통한다. 언제부터 축구를 좋아했냐고 물어보면 "태어날 때부터"라고 답한다. 돌잔치 때 축구공을 잡았기 때문이란다. 남군은 9세 무렵 유소년 축구 클럽에서 운동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다 일탈을 저질렀고 범죄에 휘말렸다. 소년법에 따른 6호 처분을 받고 입소한 소년 보호시설장 권유로 대회에 출전했다. 남군은 "축구선수 꿈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 스스로가 기특하다"면서 웃었다. 이어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충실하고 바르게 살고 싶다"고 의젓한 소감을 전했다. 자국 내전을 피해 한국을 찾은 난민 신청자 포시 완지(27), 지적장애인 정성덕(50)씨도 한국대표팀 일원으로 8일간 여정을 함께했다.
'꿈의 무대' 내년엔 노르웨이 오슬로
한국 대표팀은 4승 7패, 27위로 대회를 마쳤다. 당초 목표였던 25위엔 못 미쳤지만 이 감독은 "언어·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 팀으로 잘 마무리했다는 게 뜻깊고 값지다"고 돌아봤다. 홈리스 월드컵 대표팀 감독만 네 번째인 이 감독은 '대회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란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각지대에 있던 아이들이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대회를 즐겼잖아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사랑이었을 겁니다.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을 테니,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도 된다는 걸 깨달았으면 합니다." 이 감독의 말이다.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나눠준 '꿈의 무대'는 내년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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