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비만약 'GLP-1' 광범위 약효 주목
고혈압, 심부전, 중독까지 비만주사로?
건강개선 vs 염증완화 기전 두고 이견
잠재성 크지만 추가 의학적 근거 필요
지방 대도시의 한 비만클리닉은 홈페이지를 통해 비만약 '삭센다'를 맞으면 살이 빠질 뿐 아니라 심혈관계 질환이 개선되고, 혈당 수치가 정상화하고, 치매까지 예방된다고 홍보하고 있다. 삭센다는 당뇨병과 비만 치료에만 허가된 약인데, 의원이 나서서 이렇게 마케팅을 하니 마치 다른 병들에까지 모두 효과가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비대면 진료 앱에서 고혈압과 심부전이 있는 환자가 삭센다를 처방받는 방법을 묻는 등 비만약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 열린 미국 알츠하이머협회 국제학술대회에선 삭센다가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비슷한 성분의 또 다른 비만약 '마운자로'는 임상시험에서 간질환 위험을 감소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둘 모두 정식 알츠하이머병, 간질환 치료제로 허가받진 않았지만, 비만 외 다른 병에도 작용할 가능성을 담은 임상 연구가 속속 발표되면서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높다. 유사 성분의 비만약 '위고비'가 올 3월 미국, 영국에 이어 최근 국내에서 심혈관계 질환 예방에 대해 허가를 받은 만큼 기대는 더 커질 전망이다.
의료계와 제약업계 의견은 분분하다. 치료 대상 질환이 확대될 잠재성은 크지만, 아직 의학적 근거가 충분히 확립되진 못한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대체로 많다.
심혈관·신장·간질환, 파킨슨·알츠하이머병, 난임, 중독까지?
만병통치약으로 기대를 모으는 비만약들은 주요 성분이 체내에 있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과 비슷하게 생긴 물질(유사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GLP-1은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이다. GLP-1 유사체가 들어가면 우리 몸은 이를 GLP-1으로 착각해 인슐린을 만들어낸다. 이 원리로 GLP-1 유사체는 20여 년 전부터 당뇨병 약으로 쓰였고, 투약 중 살이 빠지는 부수적인 효과가 확인되면서 10년 전부턴 비만 치료제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젠 다른 각종 질병에 대해 증상을 개선하거나 발병 위험을 낮췄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과연 왜 그런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학계에는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가 공존한다. 먼저, 식욕이 떨어지는 데 따른 2차 효과로 보는 견해다. GLP-1 투약 후 식욕이 억제돼 비만이 치료되면 당뇨병이 개선되고, 당뇨병 때문에 생기는 동맥경화 같은 혈관 합병증도 나아져 심장과 신장 질환, 나아가 난임, 뇌혈관 질환까지 개선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뇌혈관이 건강해지면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 완화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식후 나른함을 유발하면 긴장감을 높이는 도박, 흡연, 약물 등에 대한 욕구가 낮아져 중독 증상이 나아진다는 분석도 있다. GLP-1 유사체 자체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만병의 근원인 비만을 해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현상들이란 얘기다.
이와 달리, GLP-1 유사체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여러 증상을 완화하거나 막는다는 해석도 적지 않다. 이 성분이 면역세포에 작용해 염증반응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퇴행성 뇌질환 환자에게선 독성물질을 내는 신경세포가 늘어 염증이 심해지는데, 이때 GLP-1 유사체 약물을 투여하면 염증이 줄어든다. 노보노디스크, 일라이릴리 같은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 원리를 근거로 한 뇌질환 치료 기술을 개발하는 중이다.
학계에선 두 시나리오가 유전이나 환경 요인에 따라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GLP-1이 배가 부르도록 느끼게 하는 과정을 처음 밝혀낸 최형진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치료 대상 질환 확대에 대해 현재로선 식욕 억제에 따른 부수적 효과로 설명되는 경우가 약 98%, 자체 기능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2% 정도"라며 "앞으론 이 비중이 각각 20%, 80% 수준까지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누구나 먹어도 되는 건 아냐"
비만약이 다른 질병에도 작용한다고 알려지면서 자칫 누구나 먹어도 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경향이 커질까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허양임(차의과학대 분당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대한비만학회 이사는 "체중 감량과 별도로 뇌질환, 중독 치료 등 다른 병에까지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치료 효과가 있을지는 근거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만 외 질병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해도 이를 새로운 치료제로 개발 또는 허가하는 건 다른 문제다. 신약이 되려면 기존 의약품과 비교해 뚜렷한 치료 효과가 입증돼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트렌드나 일부 임상 결과를 보고 경쟁적으로 GLP-1을 응용한 신약 개발에 뛰어드는 데 대해 일각에서 우려의 시각이 있는 이유다.
글로벌 기업들은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 비알코올성지방간염이 GLP-1 유사체의 치료 대상 질환으로 일부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 질환은 공통적으로 아직 뛰어난 치료제가 없거나 기존 치료제의 부작용이 크다. 양원석 디앤디파마텍 사업개발 상무는 "GLP-1 유사체가 다양한 질환에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만성질환에는 괜찮은 기존 약들이 많아 개발이 쉽지 않다"면서도 "치료제가 부족한 퇴행성 뇌질환에 대해 허가받는다면 새 시장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이밸류에이트파마에 따르면 GLP-1 유사체 비만약 시장 규모는 현재 약 6조 원에서 2030년 137조 원(약 1,000억 달러)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의약품별 글로벌 매출 순위에서도 2030년이면 블록버스터 항암제들을 밀어내고 GLP-1 유사체 약물이 상위권에 포진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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