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동반자 건보 인정 판결 이후]
사회보장제에 생긴 작은 교두보일 뿐
일상생활에서는 동성커플 권리 전무
"저도 이제 희망이 생겼어요."
이달 18일 오후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선고를 하고 있던 시간, 장모(30)씨는 초초하게 휴대폰 뉴스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동성 동반자에게도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사법부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이 속보로 전해지자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동성 동반자도 사회보장제도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첫 번째 법적 근거였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인 그는 3년간 만나던 연인과의 관계를 인정받지 못해 이별해야 했던 일이 떠올랐다. 2년 전 무역 회사를 다니던 연인의 중국 파견 근무가 결정돼 장씨도 함께 나가려고 했으나, 회사 안팎에서 동성 배우자 지원을 꺼렸다. 배우자 비자 발급은 물론, 건보 피부양자 자격 등 모든 사안에서 걸림돌이 발생했다.
과연 이번 대법원 판결이 동성 동반자의 다른 권리까지 인정하는 전향적 결정들로 이어질 수 있을까. 판결 속보에 환호하던 이들은 대법원이 판결 뒷부분에 단서로 달았던 표현을 보고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동성 동반자를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문제와 민법·가족법상 '배우자' 범위를 해석·확장하는 문제는 충분히 다른 국면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 판결이 곧 동성혼을 인정한 건 아니란 뜻이다.
동성 동반자 권리가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선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다. 한국은 호주제를 폐지하면서 유교 중심 가부장주의를 많이 떨쳐내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족 제도에서 동성 가족은 법과 제도 밖에 머물러 있다. 동성 동반자 가구 규모를 유추할 만한 통계는 없고, 통계청이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에도 구체적인 확인 항목이 없어 동성 결합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실태 파악이 안 된 터라, 제도화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대법원이 인정한 건보 피부양자 역시,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우선 법적으로 결혼을 인정받을 수 없어 '사실혼'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동성 커플에겐 이 과정이 까다롭다. 인우보증서(보증인 2명 인증서), 양 당사자의 가족관계증명서, 사실혼관계확인 공증 서류 등을 제출해야 하지만 서류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벽에 부딪힌다. 심기용 모두의결혼 활동가는 "보증인에겐 '문제가 생기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제성이 부여된다"며 "주변에 관계를 잘 알리지 않은 동성 동반자에게 보증인을 구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심사 과정도 어렵다. 회사에서 재직증명서를 떼는 과정, 공단 측에서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절차 중 아우팅(성소수자의 성적 정체성을 본인 동의 없이 밝히는 것) 위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인 백모(31)씨는 "직장에 성적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에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많다"며 "혹시 모를 아우팅 우려에 피부양자 등록 시스템이 바뀌어도 시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보공단이 별개 절차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건보에서만 작은 문 하나가 열렸을 뿐, 남겨진 과제가 더 많다. 장례, 상속, 병원 등 일상 곳곳에서 동성 동반자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장례와 상속에선 여전히 '법적 가족'이 우선순위를 갖는다. 배우자가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개입하기 어렵다. 심씨는 "동성 동반자는 상대가 응급실에 실려가도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다"며 "긴급상황에 대응할 법적 근거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동성 결합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일상생활에서 동성 동반자의 권리·의무 규정 근거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루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활동가는 "가족적 유대감을 공유하고 경제적으로 함께 공동체를 꾸리는 이들을 법적·제도적으로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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