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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시공 강요·묵인... 천안 하수관로 공사 '썩은물' 악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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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시공 강요·묵인... 천안 하수관로 공사 '썩은물' 악취

입력
2024.07.15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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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땅 파보니 통신선·가스관 무더기...
설계 변경 요구에 '벌점 · 계약 해지' 으름장
안전시설 설치 못한 채 2m 깊이 작업 '아찔'
감리업체는 "빨리빨리 하고 얼른 덮자" 뒷짐

지난해 6월 5일 충남 천안시 원성동 하수관로 공사현장에서 인부들이 깊이 2m 이상의 지하 공간에서 공사를 하고 있다. 깊이 2m 이상의 터파기를 할 때는 토사 붕괴에 대비해 흙막이 가시설을 설치해야 하지만, 사진에선 보이지 않는다. 감리업체 관계자(오른쪽)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독자 제공

지난해 6월 5일 충남 천안시 원성동 하수관로 공사현장에서 인부들이 깊이 2m 이상의 지하 공간에서 공사를 하고 있다. 깊이 2m 이상의 터파기를 할 때는 토사 붕괴에 대비해 흙막이 가시설을 설치해야 하지만, 사진에선 보이지 않는다. 감리업체 관계자(오른쪽)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독자 제공

감사원이 충남 천안시가 발주한 원성동 하수관로 정비공사 사업 비리 의혹을 감사하고 있는 가운데 감리사가 시공사에 ‘불법 공사’를 사주한 정황이 드러났다. 안전한 공사를 위해 시공사가 공사 설계 변경을 요청했지만 감리사와 발주처가 묵살했다는 게 시공사의 주장이다. 해당 공사 설계사와 감리사는 같은 D사로, 해당 업계에서 손꼽히는 회사다.

14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충남지역 건설업체 H사는 지난해 1월 하수관로와 차집관로 9.5km를 정비하는 천안시 원성동 하수관로 공사를 수주했다. 천안시 맑은물사업본부가 발주했으며 공사금액은 110억 원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H사는 착공에 들어가자 설계와 다른 현장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수관로를 교체하기 위해 깊이 2m 이상 터파기를 하는 과정에서 통신선 등 복잡한 지하 매설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H사 관계자는 “공사 설계도에서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던 지하 매장물이 나와 터파기 작업 90%에 굴착기를 쓰라는 설계서 내용을 이행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토사붕괴를 막기 위한 흙막이 가시설도 지하 매설물 때문에 설치할 수 없어 H사는 굴착기 사용 비율을 90%에서 50%로 낮추고 인력 이용 비율을 10%에서 50%로 상향 조정해달라는 내용으로 설계 변경을 요구했다.

안전문제임에도 감리사와 발주처, 설계사는 이 요구를 무시했다. ‘애당초부터 설계에 잘못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공사비 증액(약 17억 원)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D사 관계자는 “입찰 때 이미 설계도를 확인하고 H사가 응찰했는데, 낙찰받은 뒤 딴소리하는 것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건설기술진흥법, 건설산업기본 등에 따르면 설계가 잘못돼 안전하게 공사를 할 수 없을 때 설계 변경을 요구했다면, 감리사는 이를 발주처에 보고해야 하고 발주처는 문제가 없다면 이를 수용해야 한다. 지난해 천안시 공사현장에서는 안전사고로 5명이 사망했다.

발주처와 감리사가 계속 공사를 종용했지만 도저히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는 게 H사 측의 주장이다. 평면 설계도서상에는 지하매설물이 대략적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 터파기 작업에 이용되는 종단면설계도에는 지장물이 표시되지 않았다. 공사는 결국 10월 중단됐다.

H사가 지난해 6월 5일 촬영한 공사장면을 보면 감리사는 이 공사를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의 한 키가 넘는 깊이의 땅속 어지러운 지하매설물 사이로 안전장치(가시설) 없이 작업자들이 관로 공사를 하고 있다. H사 관계자는 설계서대로 2.2m 깊이를 수직으로 파 내려갔지만 흙이 자꾸 무너져 내려 작업자가 배관 작업을 할 수 없어 감리단장을 불렀다”며 “하지만 감리단장은 ‘얼른 배관 작업을 하고 되메우기로 작업을 마치라'는 말만 했다”고 말했다.

안전 논란에도 감리사와 발주처는 설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설계사를 두둔했고, 오히려 H사에 계약 해지를 거론하며 수십 차례 공문을 보내 공사 강행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H사는 가시설 없는, 불법으로 1.3km 구간 중 1km를 공사했다. H사에 따르면 해당 구간에선 6차례의 크고 작은 토사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해 8월 16일 오후 3시 30분, 2m 깊이로 지하 터파기 후 배관을 잇는 작업을 하던 작업자 2명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더미에 깔려 자칫 대형사고가 날뻔 한 사고가 있었다.

당시 현장에서 안전작업자가 손을 잡아 끌어 겨우 탈출했다. 이날 사고를 당한 최진일(60) 씨는 한국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피해~'라는 소리에 놀라서 위를 보니 흙덩어리가 쏟아져 내려 앞이 보이질 않았다"면서 "이날 사고로 보름간은 두려워서 일을 못하고 경기도로 일터를 옮겼다"며 아찔한 사고 상황을 설명했다. 산업안전분야 전문가인 T사 이영구 대표는 "이런 사고가 '아차사고'라고 하는데, 대형 사고가 나기 전 나타나는 전조증상"이라며 "아차사고를 가볍게 여겼다가는 큰일이 난다"며 천안 하수관로 공사 현장의 안전 문제를 지적했다. 감리사 관계자는 "흙막이 작업 때 발목까지 빠지는 일이 흔한데, 그러면 그게 모두 토사붕괴 사고냐"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다.

안전한 공사를 요구하는 시공사와 설계 오류 인정을 거부하는 감리사ㆍ발주처 사이의 갈등으로 애꿎은 시민들만 불편을 겪고 있다. 원성동 주민 김모(56)씨는 “시가 발주한 공사 현장들에 대해 전반적인 안전 점검에 나섰지만, 원성동 하수관로 정비사업의 공사 지연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있다. 시가 무책임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H사는 지난달 발주처인 천안시 맑은물사업본부 본부장과 과장, 팀장 등을 강요·협박, 보복조치, 건설산업기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다. 감사원도 8일부터 천안시를 상대로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 시의회도 움직이고 있다. 복아영 천안시의원(더불어민주당)은 "맑은물사업본부가 비리 사건 등 문제가 많아 상세하게 들여다보려고 자료를 요구 했다. 감리와 발주처가 안전조치를 무시했는지, 시공사의 불법 공사 의혹 등을 철저히 파헤쳐서 안전사고를 방지하고 혈세가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시각물_천안 원성동 하수관로 공사 사태 일지

시각물_천안 원성동 하수관로 공사 사태 일지


천안= 윤형권 기자
세종=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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