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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전문의 중심 병원

입력
2024.07.07 22:00
수정
2024.08.01 11: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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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의사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의사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늘은 오전에 외래 진료를 보고, 오후에는 수술을 세 건 했다. 저녁을 먹고, 병원 건물 기둥에 기대어 뒷산 숲을 멍하니 바라봤다. 숲 멍때리기는 물멍, 불멍 부럽지 않은 훌륭한 힐링의 시간이다. 날카로운 침엽수보다는, 위아래 색깔이 다른 푸근한 나뭇잎을 가진 활엽수가 우거진 숲이 훨씬 더 좋다. 음악을 듣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평화로운 숲의 물결을 보며,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세상에 이런 호사가 없다. 그러다 문득 나훈아의 ‘테스형’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는 가사로 시작한다. 나훈아의 절창이 오늘따라 마음을 후벼 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퇴근할 필요가 없는 두려운 당직날이었다. 어떻게든 버티다가 눈 떠보면 다시 출근해 있는 마법이 예비된 날.

저녁이 되면 당직복을 챙겨 입고 휴대폰을 여러 개 들고 다니는 중년의 교수들을 만난다. 외과, 내과 등 필수 의료과는 물론, 그간 삶의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비필수 인기과’에서도 당직을 선다고 한다. 성형외과, 영상의학과, 심지어 정신과까지도 해당된다. 교수 숫자가 적은 과일수록 당직의 빈도는 높아진다. 정신과 환자는 밤이 깊어질수록 불안이 심해져 새벽에 응급실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환자가 새벽에 온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 환자의 새벽을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수 진료과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한 명의 환자에게라도 필요한 과라면 모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대학병원도 숲의 생태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곳도 바위와 흙, 물과 계곡, 산짐승과 새, 그리고 그 위에 촘촘히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큰 산이다. 배롱나무의 원래 이름 백일홍은 백일 동안 붉게 핀다는 뜻이다. 꽃 하나가 백일 내내 피어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한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피어 백일을 이어간다. 아직 피지 않는 꽃,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들, 큰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가 자라고 있어야 온전하고 지속 가능한 숲이 된다. 어느 생태계나 건강하게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가 없다면 쇠퇴와 멸절이라는 필연을 맞는다. 작금의 대학병원들은 모두 황폐해진 산이다. 작은 나무들은 폭우에 휩쓸려 모조리 뽑혀 나갔고, 크고 매끈한 나무들은 혼돈이 없고 햇빛이 많은 곳으로 조용히 나가고 있다. 의료 대란의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협의, 조정, 중재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현실이 절망스럽다.

‘눈 떠보니’ 전문의 중심 병원, 아무런 준비 없이 도둑처럼 와버렸다. 의료 사태 전과 비교해 지금의 60~70% 진료량으로는 수많은 병원들이 매일 수억 원의 적자를 누적해가고 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병원을 밤낮없이 지켜줬던 전공의들이 이 눈덩이 규모의 적자를 턱없이 낮은 처우를 받으며 군말 없이 메꾸고 있었던 셈이다. 전문의 중심 병원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전문의들의 과로로 겨우 유지되는 지금의 진료량보다 훨씬 더 적은 진료를 해도 병원이 적자가 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나마 지방의 필수 의료를 떠받치고 있었던 대학병원들의 연쇄 도산이라는 끔찍한 현실이 펼쳐지지 않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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