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경의선 책거리에 웬 빨간도깨비?"... 생뚱맞은 상징·조형이 경관을 망친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경의선 책거리에 웬 빨간도깨비?"... 생뚱맞은 상징·조형이 경관을 망친다

입력
2024.06.20 04:30
12면
0 0

문화공간 책거리에 형형색색 상징물이
"이게 왜 지역을 상징하냐" 의구심만
"공공 조형물 설치 시 주민의견 수렴을"

18일 오후 찾은 서울 마포구 경의선 책거리 입구에 레드로드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전유진 기자

18일 오후 찾은 서울 마포구 경의선 책거리 입구에 레드로드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전유진 기자


"이 정도면 못생김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봐요."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경의선 책거리. 근처에서 8년째 카페를 운영하는 이승연(48)씨가 창밖을 내다보며 또 한숨을 쉰다. 몇 달 전 이 책거리에 들어선 조형물이 이씨의 눈에 들어왔다. 투덜거림은 이어진다. "단골손님이나 동네분들이 매번 물어보세요. 도대체 저게 뭐냐고. 예전엔 책과 함께하는 오래된 기찻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의미도 없는 장식만 눈에 띄게 됐죠."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가보니 형형색색 조형물이 가득했다.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는 빨간 도깨비, 윙크를 하는 노란 도깨비, 청록색 커다란 하트 조형물,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는 핫핑크 사각 조형물 등등. 지난해까진 볼 수 없던 장식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책거리에 글로벌 복합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하겠다"는 마포구의 레드로드 프로젝트 일환이다.

18일 오후 찾은 서울 마포구 경의선 책거리에 하트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전유진 기자

18일 오후 찾은 서울 마포구 경의선 책거리에 하트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전유진 기자

야심찬 프로젝트지만 정작 주민들 반응은 별로다. 이게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고, 왜 우리 지역을 상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문화공간다웠던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불만도 잇따른다. 인근 망원동에서 왔다는 김모(26)씨는 "거리 곳곳에 레드로드라는 빨간 글자가 쓰여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며 당황했다.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에 거주하는 이모(29)씨도 "이미 철길을 복원해 특색을 갖춘 경의선 책거리에, 굳이 새로운 조형물을 설치할 필요가 있냐"며 의문을 표했다.

꾀끼깡꼴끈... 의미 없는 조형물 난립

서울시는 4일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 제기됐던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의 '괴물' 조형물을 10년 만에 철거했다. 서울시 제공

서울시는 4일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 제기됐던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의 '괴물' 조형물을 10년 만에 철거했다. 서울시 제공

도시 미관을 개선하고 관광객을 끌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환경개선 사업이 오히려 지역 특색과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객관적 기준이나 의견수렴 없이 특이한 조형물로 이목을 끌려는 식으로만 사업이 진행되다 보니, 되레 잘 유지되던 경관이 훼손되는 경우도 많다. 장재민 한국도시정책연구소장은 "시민들이 원하는 것보단 치적 쌓기에 집중된 지자체 사업이 많다"며 "객관적 기준과 연구 용역 없이 무작정 진행하다 보니, 일단 만들고 반응이 안 좋으면 철거하는 식의 사업도 다수"라고 짚었다.

실제 서울시는 4일 여의도 한강공원에 설치된 '괴물' 조형물을 철거했다. 2014년 약 2억 원을 들여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속 괴물 캐릭터를 10m 넘는 크기로 구현했지만, 시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1,00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철거하게 된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조형물을 볼 때마다 섬찟하다는 민원이 꾸준히 제기됐다"며 "공공장소에 부적절하단 판단으로 철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부산 도시고속도로 대연터널 위에 설치된 간판도 시민들 빈축을 샀다. 부산시설공단은 지난달 21일 공공디자인 개선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꾀. 끼. 깡. 꼴. 끈.'이라는 정체불명 간판을 설치했다. 알고 보니 박형준 부산시장이 1월 시무식에서 공직자 덕목으로 언급한 △꾀(지혜) △끼(에너지·재능) △깡(용기) △꼴(디자인) △끈(네트워킹)을 표현한 것이었다. 지자체장 '훈시말씀'이 교통시설물에 붙어 시야를 어지럽힌다는 지적이 빗발치자 결국 사흘 만에 간판을 내렸다.

문화예술인·시민 의견 반영해야

부산 도시고속도로 대연터널 위에 설치된 '꾀 끼 깡 꼴 끈' 간판. 부산시설공단은 지난달 24일 간판을 철거했다. 네이버 지식인 캡처

부산 도시고속도로 대연터널 위에 설치된 '꾀 끼 깡 꼴 끈' 간판. 부산시설공단은 지난달 24일 간판을 철거했다. 네이버 지식인 캡처

이처럼 공공 조형물이 무분별하게 설치되는 상황이 반복되자, 정부가 나서 권고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민권익위는 2014년 '지방자치단체 공공 조형물 건립 및 관리체계 개선 방안'을 지자체에 권고했다. 조형물 설치 과정에서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심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19일 권익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 243개 지자체 중 권고를 이행한 곳은 164개에 불과했다. 별도의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업에서 지자체장의 역점 사업을 표현할 게 아니라 다양한 주민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시장·구청장의 변덕보단 지역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더 반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사업 선정 후에도 지자체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도 "시민 공청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들을 때 편협한 선택을 방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유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