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엄수
문화예술계 인사 수백 명 참석
“시의 아버지를 잃은 먹먹한, 시의 고아가 된 심정으로 선생님과 영원히 이별하게 됐습니다.”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고(故) 신경림 시인 영결식에서 고인의 약력 보고를 마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날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유족과 도 의원,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 염무웅 문학평론가 등 정치권과 문화예술계 인사 수백 명이 참석해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날 영결식은 소박한 성정의 시인이었던 고인의 추모와 함께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자리였다. 장례위원장인 염 평론가는 추모사에서 “선생님은 이름난 시인이 되고 난 다음에도 유명인 행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서 “끊임없는 자기성찰은 선생님의 발길을 바르게 이끈 등불이고 나침반”이라고 말했다. 문정희 국립한국문학관장은 “험난한 시대를 지나며 철창 경험을 들려줄 때도 유머를 잃지 않고 분노 섞인 용어 없이 그저 소년 벌거숭이처럼 순수한 선생님의 모습에 깊게 놀랐다”고 전했다.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인 이근배 시인은 ‘한 시대를 들어 올린 가난한 사랑노래 온 누리에 펼치소서’라는 조시를 읊었다. 정희성 시인과 이재무 시인도 각각 조시를 통해 “오늘 선생의 ‘파장’과 ‘낙타’를 다시 읽으며 나는 눈물 삼켜 선생을 전송한다” “글과 사람됨의 차이가 없이 사시더니 불쑥 우리 곁을 떠나셨군요”라며 고인을 떠나보내는 지극한 애통을 나타냈다. ‘시인 신경림’이라는 책을 쓴 이경자 소설가는 고인과의 추억을 담은 글을 다 읽지 못하고 “선생님은 떠나셨습니다”라는 말로 추도사를 마쳤다.
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고인은 1935년 충북 충주군(현 충주시)에서 태어나 1956년 ‘문학예술’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73년 낸 시집 ‘농무’는 한국 시사에서 민중시의 시대를 연 시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에서도 또 삶에서도 가난하고 서러운 이들의 곁에 서려던 고인은 1980년대 내내 재야단체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투신했다. 2000년대 이후로도 꾸준히 시집을 내며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상, 호암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고향인 충북 충주 노은면 선영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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