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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대란 아닌 의료공백에 멈춘 전공의 이탈… 혼란 속에 명확해진 K의료의 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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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대란 아닌 의료공백에 멈춘 전공의 이탈… 혼란 속에 명확해진 K의료의 갈 길

입력
2024.03.20 04:30
수정
2024.03.20 10:32
1면
0 0

환자 희생, 의료진 헌신에 의료대란 막아
중증은 대형병원, 중등증은 종합병원 분산
의료전달체계 정상화, 개혁 정책도 급물살
"사회적 공감대 기반 의료개혁 박차 가해야"

전공의 집단행동 한 달을 앞둔 19일 대구 한 대학병원 1층 로비에 '의사 선생님 환자 곁을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소원 쪽지가 붙어 있다. 뉴시스

전공의 집단행동 한 달을 앞둔 19일 대구 한 대학병원 1층 로비에 '의사 선생님 환자 곁을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소원 쪽지가 붙어 있다. 뉴시스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뛰쳐나간 지 꼬박 한 달이 됐다. 빅5 병원 전공의들을 필두로 전국 수련병원 전공의 1만 여 명이 집단 사직서를 내고 지난달 20일부터 진료 거부에 들어갔다. 남은 의료진만으로는 2주도 버티기 힘들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료공백은 있을지언정 의료대란이나 의료붕괴가 발생하진 않았다. 환자들의 희생과 의료진의 헌신, 위급한 환자에게 병상을 양보한 국민 덕분이다.

비상진료대책에 따라 중증ㆍ응급환자는 상급종합병원으로, 중등증ㆍ비응급환자는 종합병원으로 분산되면서 수십 년 왜곡됐던 의료전달체계도 바로잡히고 있다. 전공의 이탈이 낳은 역설에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대한민국 의료가 나아갈 길이 명확해진 만큼 정부가 하루빨리 혼란을 수습하고 의료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 시동 걸었다

1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현재 상급종합병원 중환자실 입원환자는 3,004명, 종합병원까지 포함한 전체 중환자실 입원환자는 7,361명으로 평상시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응급의료기관도 전국 408곳 중 396곳(97%)이 병상 축소 없이 운영되는 중이다. 일반입원 및 수술은 40~50%가량 크게 감소했지만, 어디까지나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상급종합병원에 한정된 수치다.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되는 종합병원 입원환자는 전공의 집단 사직 이전인 지난달 첫 주와 비교해 11% 증가했다. 관절, 뇌혈관, 대장항문, 심장 등 특정 질환을 다루는 전문병원들도 환자들로 북적거린다. 상급종합병원에 몰렸던 환자들이 진료를 보지 못하자 중형병원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환자 전원 시스템을 가동했다. 고난도 의료역량을 갖춘 상급종합병원은 중증환자 수술에 집중하고, 촌각을 다투지 않는 환자는 2차 병원이 맡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가 원했던 변화다.

의료공백 극복을 위한 대책들은 곧 의료개혁의 단초가 됐다. 의사 업무 일부를 담당하면서도 제도 밖에 있던 진료지원(PA)간호사들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고, 전공의 수련제도 개편, 국립대병원 집중 육성 및 교수 1,000명 증원, 수가 제도 대수술 등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여러 개혁 정책들이 속도감 있게 추진되고 있다. 대형병원에선 입원환자가 줄어 병동 통폐합도 있었지만, 평상시 환자 수십 명을 돌봤던 간호사들 사이에선 “환자 수가 적정 수준으로 줄어든 지금이 정상적 상황”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뜻하지 않게 보건의료가 강제적으로 정상화되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의료체계를 제대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개혁 적기, 흔들림 없이 완수해야

19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진료센터로 환자와 보호자가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진료센터로 환자와 보호자가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의료개혁의 핵심은 상급종합병원 쏠림 현상 개선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1~6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지급된 의료기관(약국 제외) 요양급여 비용 43조5,356억 원 가운데 상급종합병원 45곳이 차지하는 비중은 23%(10조723억 원)에 달한다. 전국 모든 의원을 합친 비용 12조1,300억 원에 버금간다. 상급종합병원 전체 진료비 중 외래비 비중도 2018년 35.4%에서 지난해 36.4%로 증가했다. 상급종합병원이 경증환자까지 독식하는 탓에 1, 2차 병원은 고사 위기에 내몰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조 원장은 “상급종합병원은 백화점식 경영과 외래 진료를 지양하고 간 이식, 뇌종양 치료 등 중증ㆍ희소ㆍ고난도 치료 전문으로 특화해야 한다”며 “2차 병원과 공공병원이 의료체계를 지탱하는 허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정책적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급종합병원이 원래 목적에 맞게 운영되려면 인력 구조도 전문의 중심으로 개편돼야 한다. 수련병원별로 34~46%에 이르는 전공의 비중을 미국 일본처럼 10% 수준으로 낮추고 전문의 채용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의료기관 설립 시 전공의를 전문의의 2분의 1로 산정하도록 의사 배치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그동안 의사가 부족한 탓에 병원마다 인건비가 급증하고, 높은 급여로 인해 전문의를 늘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며 “양질의 전문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국민 의료비 부담도 완화하려면 반드시 의사 수가 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가 끝난 후에도 의료전달체계가 안착되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를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의료 정책이 의사들에게 더는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대형병원이 무조건 좋다는 국민 인식이 바뀌고 있는 지금이 의료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할 적기라는 것이다. 나백주 서울시립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정부는 일시적 현상을 의료 정상화라 자화자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의사가 늘어나면 어떻게 지방에 배치할지, 지방에서도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은 어떻게 조성할지, 공공의료는 어떻게 강화해야 할지 이제는 답을 내놔야 한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도 “의료 정책 논의에 의사는 물론 간호사, 약사, 환자 등 의료현장의 다양한 직역이 참여하도록 공론의 장을 만들되, 정부가 정책 결정권을 갖고 개혁을 흔들림 없이 완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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