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현장서 자재에 깔려 하반신 마비
불편한 몸 탓 부적응... 부담 가중 퇴직
공상 소방관 업무·치유 환경 마련해야
"다리 한번 만져보세요. 사고를 당한 게 21년 전인데 지금도 피부 온도가 제멋대로예요."
2003년 7월 14일. 화마(火魔)가 덮친 날이다. 1년 차 신입 소방관의 꿈도 그렇게 무너졌다. 전직 소방관 김철수(가명·48)씨. 그날 팀의 막내였던 김씨는 화재 현장에서 요추 신경을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다. 후유증으로 7년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사고는 그의 남은 인생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지난달 20일 경북 상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의 오른쪽 다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피부 온도가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목발이 없으면 움직이기도 어렵고, 마약성 진통제 복용은 일상이 됐다.
육신의 고통은 차라리 낫다. "시민들을 구하는 영웅이 되겠다"던 포부를 펼치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응어리로 남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복귀한 일터에서 동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2015년 3월 결국 제 발로 소방서를 나왔다.
불길 뛰어들어도 후유증과 상처만 남아
소방관 순직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그들의 헌신에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반짝 관심으로 '공상(공무상 재해 보상) 소방관'들의 처우가 나아지는 건 아니다. 지난한 치료 및 재활 과정을 거쳐 복직해도 김씨처럼 중도에 일을 그만두는 이가 부지기수다. 몸이 불편해도 소방관으로서 자긍심을 오래 이어갈 수 있도록 안정적 근무 여건을 마련하는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소방청 자료를 보면, 2012~2022년 화재 진압과 구조 등 직무 수행 중 다치거나 숨진 소방관은 7,282명이나 됐다. 2020년과 지난해에는 그 수가 1,000명을 넘기도 했다.
불길 속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한번 다치면 여파가 엄청나다. 김씨도 불이 붙은 건물 외벽에 깔리면서 8개월간 여러 차례 수술과 재활 치료 끝에 직장인 119 안전센터로 복귀했다. 재해보상은 승인됐지만 비급여 항목 지원이 안 돼 동료들이 십시일반 모은 후원금으로 병원비를 지불했다. 그 고마움 때문에 퇴직이 아닌 복직을 결심했다. 김씨는 "휠체어를 타고서도 소방관으로 당당히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용기는 금세 좌절로 바뀌었다. 건강의 제약 탓에 내근 부서를 순환하며 소방교육 등 행정 업무만 맡았다. 후유증이 심할 때면 출퇴근조차 버거웠고, 주변의 시선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휴직도 해봤으나, 업무를 더는 계속하기 어려웠다. 김씨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보니 동료들의 눈치를 볼 때가 많았다"고 했다.
"다친 몸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달라"
정부도 치료비 지원 등 공상 공무원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다. 인사혁신처는 지난달 15일 '공상 공무원 간병비·진료비 현실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공상 등급과 무관하게 하루 간병비를 15만 원으로 올리고 진료비 역시 전국 의료기관 평균 가격에 맞춰 인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친 소방관들이 바라는 건 단순한 피해 보상이 아니다. 장애를 지니고 일터에 돌아와도 새로운 직무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2003년 출동 과정에서 대퇴부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전모(63)씨는 "재택근무나 시차출근제 등 다양한 업무 형태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퇴근만 편해져도 공상 소방관의 업무 부담을 크게 덜 것이라는 설명이다.
퇴직한 공상 공무원 지원책도 요구된다.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는 다친 소방관이 적지 않은 현실을 감안해 심리 지원, 일자리 주선 등 공무에 기여한 공로를 반영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씨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공상 퇴직자들끼리 마음의 상처를 공유하는 자리나 전문 상담 프로그램을 마련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방재행정학과 교수는 "현직에 비해 퇴직한 공상 공무원 정책이 미흡한 건 사실"이라며 "제도적 보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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