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에만 3번 끌려갔어요. 거기에서 생긴 아픈 기억은 안 떠올려요. 생각만 해도 다시 고문당하는 것 같아…."
삼청교육대·형제복지원 피해자 제정화씨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9년 부마(부산·마산) 민주항쟁에서 경찰에 붙잡힌 뒤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제정화(67)씨를 지난달 20일 부산에서 만났다. 40여 년 만에 국가로부터 뒤늦게 피해를 인정받았지만 그의 몸과 마음의 상흔은 그대로였다. 국가로부터 무참히 짓밟혔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1979년 부마항쟁...무너진 22세 재봉사의 삶
평범한 삶이 틀어진 건 고작 스물두 살이던 1979년 가을. 8년 차 재봉사였던 그가 그해 10월 17일 부산 중구 국제시장에서 열린 부마항쟁에 참가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린 학생들까지 '독재 타도'를 외치는 모습에 감명받은 제씨는 시위대 옆에서 박수를 쳤다. 그 순간 뒤통수에 날아온 경찰봉을 맞고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 차려보니 경찰서였어요. 옆 사람은 제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구류형 받고 해운대경찰서로 가서 14일 살고 나왔어요."
끈질기게 제씨를 감시하던 경찰은 이듬해 7월 새벽, 집에 들이닥쳐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삼청교육대는 신군부 집권 후 사회정화 명목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이다. 쉴 새 없이 훈련하고, 이유 없이 맞았다. "탈진하면 물속에 거꾸로 집어넣는데 살겠다고 몸부림치면 '아픈 척했다'고 맞았어요. 기절해서 반응이 없어야 안 맞아요."
'사회악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씨가 본 입소자 절반은 전과가 없었다. "취재진이 방문하면 문신 있는 사람들만 웃통을 벗기고 촬영했다"고 기억했다. 제씨는 다른 입소자들과 배급을 나누며 버텼다. 지옥 같은 4주가 지나고서야 풀려났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후유증으로 환청과 불안증이 생겼다. "너를 혼내주겠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불량배' 낙인이 걱정돼 스스로 피해자라고 밝히지도 못했다. "환청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보니까 방에 틀어박혀서 친구들, 가족들이랑도 멀어졌어요. 술·담배만 엄청 늘었죠."
형제복지원에 1,000일 감금
3년 뒤인 1983년 10월 경찰이 그를 또다시 찾아왔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그에게 경찰은 주먹부터 휘둘렀다. 영문도 알 수 없이 끌려간 곳은 부산 형제복지원이었다. 제씨는 1986년 11월 탈출하기까지 3년간 세 차례에 걸쳐 끌려갔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비좁은 방에 60~65명의 수용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탈출하지 못하게 철창을 달고 화장실은 정해진 시간에만 갈 수 있었다.
복지원에서 기억나는 건 끝없는 강제노역과 폭행이다. 담벼락 공사에 동원돼 온종일 자갈을 깨고 마대자루를 지고 다녔다. 운전교습소 작업장에도 투입됐다. 수입은 전부 박인근 원장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노역 중에도 감시 업무를 맡은 '중대장', '소대장'들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나를 빨갱이로 몰려고 고문하는구나' 착각했을 정도로 많이 맞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옆방 동료가 맞아 죽는 걸 보고 탈출을 마음먹었다. "순한 친구였는데 이유도 없이 각목으로 패서 죽였어요.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뱃가죽이 위에 붙더라고요. 항의하고 싶은데 나도 맞을까 봐 뻥긋 못 했어요. 1986년 10월에 감시가 덜한 일요일을 노려 도망쳤어요."
탈출에 성공했지만 삶은 무너졌다. 1988년 1월 제씨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이듬해 4월까지 입원치료를 받았다. 사회적 낙인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가정도 꾸리지 못했다. 막노동을 하며 대구, 인천, 서울을 떠도는 생활이 시작됐다. "끌려갔다가 나왔다 하다보니 동생들이 언제 결혼했는지도 모르는 게 한"이라고 제씨는 가슴을 쳤다.
1심 승소..."발 뻗고 살 집 하나 구할 것"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시작되면서 제씨가 겪은 폭력도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2021년 5월 그를 부마항쟁 피해자로 인정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이듬해 제씨의 삼청교육대·형제복지원 피해를 인정했다.
같은 해 국가배상 소송도 시작했다. 제씨가 형제복지원에 강제 입소되고 연이은 국가폭력으로 정신질환이 발병·심화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게 관건이었다. 정부는 당시 경찰 조서를 근거로 제씨의 가족이 복지원 입소를 의뢰했다고 주장했다. 제씨 측은 어머니와 이웃 주민의 경찰 진술, 제씨가 입원치료를 받은 병원 진단서, 기타 수사보고서 등을 모아 그가 영장 없이 불법체포됐으며 가혹행위를 당해 정신질환이 발생·악화했음을 증명했다.
정부는 지난 14일 1심에서 제씨 측이 청구한 5억 원 중 "3억 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판사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던 제씨가 겪었을 육체·정신적 고통은 상당했을 것"이라고 피해를 인정했다.
판결 소감을 묻자 그제야 희망이 스쳤다. "(배상금 받으면) 발 뻗고 살 집 하나 구하고 팔도 어디든 여행 다니고 싶어요. 일단은 '나, 이겼다'고 동생들, 조카들한테 연락해 보려고요."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올해 1월 법무부는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 26명에 대한 배상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번에도 불복할 가능성이 크다. 제씨 측도 기존 5억 원에서 청구 배상금을 높여 항소할 계획이다. 재판을 맡은 변영철 변호사(법무법인 민심)는 "일반적인 국가폭력 피해 배상금 수준을 고려해 청구했는데 판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반성했다. '저 아저씨처럼 살고 3억 받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더라"며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냐. 애초에 위자료 액수가 잘못 형성됐다"고 항소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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