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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에 찌든 18년, 그는 자꾸 넘어졌다... 방역 강화의 그늘 '소독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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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에 찌든 18년, 그는 자꾸 넘어졌다... 방역 강화의 그늘 '소독노동자'

입력
2024.02.02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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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약 장기 노출돼 산재 신청한 이학문씨
코로나 사태 거치며 방역노동자 건강 위협
일용직 다수, 보호장비 등 규정은 나몰라라
"독성물질 노출 피해는 장기적으로 나타나"

지난달 23일 서울 강동구 천호아우름센터에서 만난 소독노동 피해자 이학문씨가 건강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이씨는 방역소독업체에서 근무하면서 독성물질에 중독돼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박시몬 기자

지난달 23일 서울 강동구 천호아우름센터에서 만난 소독노동 피해자 이학문씨가 건강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이씨는 방역소독업체에서 근무하면서 독성물질에 중독돼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박시몬 기자

3년 넘게 이어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시민들의 위생 의식이 크게 높아진 것도 그중 하나다. 덩달아 방역소독업체도 늘어 지난해 기준 전국에 1만736곳이 운영 중이고, 감염병의 위력을 절감한 터라 관련 산업의 성장세도 지속될 전망이다. 하지만 성장 뒤엔 그늘도 있는 법.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독성물질을 직접 다뤄야 하는 방역소독노동자는 안전하냐는 물음이다.

지난달 23일 만난 이학문(54)씨의 오른손은 심하게 흔들렸다. 손만 떨리지 않는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직이려면 지팡이가 필수다. 소변을 조절하지 못해 몸에 패드를 덧댄 채 생활한 지도 몇 년 됐다. 그나마 상태가 좋아진 게 이 정도다. 제대로 먹지 못해 한때 성인 남자의 몸무게가 30㎏대로 떨어질 만큼 야위었다.

이씨의 병명은 ‘다계통 위축증’. 그는 “쉽게 말해 뇌가 쪼그라드는 병”이라고 했다. 조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일하다가도, 멀쩡히 걷다가도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2016년 찾아간 병원은 “18년간 몸담은 방역소독업체 소독약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내놨다.

내 몸 죽이는 약, 숨처럼 들이마셔

소독 피해 산업재해를 신청한 이학문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강동구 천호아우름센터에서 인터뷰 중 신경질환으로 넘어져 생긴 손 수술 흔적을 내보이고 있다. 박시몬 기자

소독 피해 산업재해를 신청한 이학문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강동구 천호아우름센터에서 인터뷰 중 신경질환으로 넘어져 생긴 손 수술 흔적을 내보이고 있다. 박시몬 기자

직장에서 이씨는 약에 절어 살았다. 매일 아침 방역 작업에 쓸 약품 원액을 밀폐된 회사 지하창고에서 희석했다. 그러곤 하루 10시간 정도 아파트, 공공기관에 성분 모를 약을 치고 나면 온몸이 소독약, 살충제로 흠뻑 적셔졌다. 유일한 보호막은 얇은 면 마스크에 목장갑뿐이었다.

자주 머리가 핑 돌았지만 일이니까 그냥 버텼다.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자동차 면허 갱신에 실패했을 때도, 집에 가는 길을 자꾸 잊어버릴 때도 애써 이상신호를 외면했다. 이름도 생소한 병명을 들은 그해 4월 가장은 결국 생업을 포기했다. 이씨의 산업재해 신청을 대리하는 노무법인 사람과산재의 유연주 노무사는 “일기와 증언을 토대로 DDT, 메틸브로마이드, 메타미도포스, 클로로피리포스 등 신경계 질환을 유발하는 유독성 물질에 노출된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씨가 한창 일할 때보다 독성물질 규제가 강화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소독약 중독은 의외로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경남 거제시에 사는 주부 A(57)씨는 감염병이 맹위를 떨치던 2022년 9월 ‘꿀알바’라는 입소문에 소독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가 작업 중 깨질 듯한 두통을 느꼈고, 이튿날 아침엔 코피까지 쏟았다. 병원에서는 소독약 살충 성분인 ‘델타메트린’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2018년 대한항공 여객기 내부를 청소하던 노동자들이 집단 실신했을 당시 쓰인 소독약의 주성분이다.

코로나로 커진 소독업... 보호규정은 유명무실

대구 남구보건소 소속 방역요원이 2022년 7월 한 경로당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소독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대구 남구보건소 소속 방역요원이 2022년 7월 한 경로당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소독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렇게 위험한데도 법이 정한 안전장치는 현장에서 무용지물이다. 특히 단기 일용직을 쓰는 영세업체가 심각하다. A씨를 고용한 업체도 취한 조치라곤 ‘방역’ 두 글자가 적힌 조끼 한 벌을 지급한 게 전부였다. 감염예방법에 따르면, 방역소독업체는 방독면 및 보안경을 각각 5개 이상, 보호복을 5벌 이상 ‘보유’해야 한다. 문제는 말 그대로 갖고만 있을 뿐이다. 노동자가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일은 드물다. 이범진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는 “비산되는 살균·살충 성분은 눈코입과 피부를 통해 스며들어 보호복 없는 작업은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관련 업체에서 일하려면 위험성 안전교육 등을 16시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한다는 규정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한 소독업체 관계자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일용직을 뽑아 투입하는데, 그때마다 절차를 챙길 순 없는 노릇”이라 푸념했다. 관리·감독을 맡은 서울시 한 보건소 관계자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자체 점검을 한다”면서도 “장비 부실이 적발돼도 영세업체는 통상 계도 선에서 마무리한다”고 말했다.

감염병의 예방 관리에 대한 법률 시행규칙에는 소독업체가 갖춰야 하는 시설·장비·인력이 명시돼 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감염병의 예방 관리에 대한 법률 시행규칙에는 소독업체가 갖춰야 하는 시설·장비·인력이 명시돼 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이씨의 산재 인정 여부는 방역소독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갈 길은 멀다. 2022년 3월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한 산재 역학조사부터 1년 반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사업장이 영세해 열악한 작업환경을 입증하는 약물이나 보호구 기록이 남아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씨는 다른 업계 동료들을 위해 2년을 굳세게 견뎠다.

이철갑 조선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독성물질 노출의 피해는 장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업체를 거쳐간 작업자 명단을 확보하고 역학조사를 실시하는 등 당국이 적극적으로 노동자 보호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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