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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이 피노체트를 버린 까닭

입력
2024.02.0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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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레이건과 피노체트

'냉전의 기획자'라 불리는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 시절인 1976년 피노체트를 만나 담소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냉전의 기획자'라 불리는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 시절인 1976년 피노체트를 만나 담소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미주개발은행(IADB)은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경제사회 개발을 위해 자본금 1,000억 달러 규모로 1959년 설립된 세계 최대 지역개발은행이다. 70년대 중반 역외국 가입도 허용됐지만, 주로 냉전기 중남미 우파 독재정권을 버티게 해준 자금줄이었다.

1984년 말 대선에서 승리해 집권 2기를 맞이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85년 2월 5일 칠레 피노체트 정부의 130억 달러 차관 요청에 대한 IADB 표결에 '인권'을 명분 삼아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아옌데 정권을 73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집권한 피노체트를 지탱해온 가장 든든한 기둥에 사실상 처음 공식적-공개적으로 균열이 생긴 셈이었다.

81년 집권 이래 레이건 행정부는 친미우파정권이라면 자국 내 독재도, 인권 탄압도 묵인했고 CIA 등을 통해 좌파 반정부세력 색출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다. 최대 수혜자 중 하나가 피노체트였다. 피노체트의 17년 집권기 동안 사망-실종자만 3,200여 명에 달했고, 10만여 명이 정치범으로 투옥돼 3만여 명이 추방됐고 또 3만여 명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해외 망명자는 100만 명이 넘었다. 지미 카터 정부가 칠레의 차관 요청을 8번이나 묵살한 까닭이 그것이었지만, 레이건과 군인 출신 초대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 체제의 미 행정부는 철저히 피노체트를 도왔다.

80년대 중반 사정이 달라졌다. 중남미 다수 국가가 민주화-안정을 회복했고, 미국-구소련의 외교 관계도 유화국면을 맞이했다. 특히 당시 구소련엔 중남미 좌파세력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칠레 경제는 82년 이래 국가부도 직전 상황이었고 반정부시위-폭력진압 사태가 연일 재연되고 있었다. 83년 기독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민주연합’이 결성됐다. 레이건의 ‘곪은 손가락(sore thumb)’이었던 피노체트는 89년 민주화-대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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