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NYT·WP, 2023 최고의 시집
‘날개 환상통’ 펴낸 김혜순 시인
“여성 목소리, 세계적 보편으로”
"영적이고, 기괴하고, 미래가 없는 상황 등 다양한 종류의 공포로 다가온다."
"김혜순의 시는 번역을 통해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불멸의 영어로 날아오른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2023년 최고의 시집 중 하나로 김혜순(68) 시인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을 꼽으며 각각 이렇게 평가했다. "요즘 미국에서 시를 쓰면서 김 시인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시인인 척만 하는 셈"이라는 미국의 시인 포러스트 갠더의 말은 최근 한국 문학의 세계적 활약상에서 유독 뚜렷한 김 시인의 족적을 가늠케 한다.
미국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2012·2019)과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2019), 스웨덴 시카다상(2021), 영국 왕립문학협회(RSL) 국제작가 선정(2022), 그리고 2023년 전미 도서비평가협회(NBCC) 번역서상 후보 선정까지. 1979년 등단 당시 한 평론가에게 "이걸 시라고 쓰고 앉았나. 혹시 심사위원의 애인 아닌가"라고 모욕당했던 1955년생 한국 여성 시인의 과장 없는 기록이다.
"왜 세계는 김혜순에게 주목하나"
‘…너는 내 이야긴 너무 작아서 언제나 때릴 수 있다고 하고 내 이야긴 네가 만든다 하고 내 이야긴 너무 작아서 네 작은 고막에 붙어사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짐승 정도라고 하지만 내 작은 이야긴 네 뇌 속의 다리들을 건너 세 갈래 길에서 세번째 길을 오래도록 걸어 네 해마에 살림을 차리고 꿈마다 네가 비명을 지르는 정도야 그 정도야’
어느 작은 시 - 김혜순
NYT와 WP의 2023년 최고의 시집에 실린 김 시인의 '어느 작은 시' 마지막 구절은 제3세계의 여성 시인이 "15년 전 작품이 번역되자마자 북미와 유럽에서 추종자를 끌어모은"(뉴요커·2023년 7월) 까닭을 보여준다.
김 시인의 시는 한때 국내 문학계에서 '살림하고 연탄 가는 여자의 사소한 이야기'라는 멸시에 시달렸다. 등단 이래 여성과 소수자의 언어로 치열하게 위계에 맞선 그의 문학에 대한 백안시였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시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시인은 여성성과 죽음, 신경통 등 사적인 고통뿐 아니라 세월호 등 사회적 참상으로 인한 타인과 경계 바깥의 고통까지 몸으로 사유하면서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을 쓴 황인찬 시인은 "그 수많은 고통을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탐구하는 것이 김 시인의 지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세상의 몸을 자기 몸으로, 그리고 시의 몸으로 산 그의 문학은 이제 "어떤 나라의 독자가 읽어도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고통이 됐다."(이광호 문학평론가) 한국과 아시아라는 지역성의 한계를 넘어 '인간 보편의 정서'에 맞닿으면서 전 세계인의 뇌 속 "해마에 살림을 차리고" 존재를 각인시킨 셈이다.
“저항할 수 없는 힘” 번역가 최돈미와 호흡도
김 시인의 세계적 명성은 한국계 미국인 시인이자 번역가인 최돈미(61)와의 호흡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5·18 민주화운동을 보며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번역'을 결심했다는 최 번역가는 2000년대 초 "당신의 시집을 번역하고 싶다"며 생면부지의 김 시인을 대뜸 찾아갔다. 이후 그는 '날개 환상통'을 포함해 김 시인의 시집 7권을 번역했다.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과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최 번역가는 그로테스크하고 때론 잔혹한 낯선 이미지로 충격을 가하는 김 시인의 시를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원문이 가진 언어의 정수를 그대로 뽑아낸다."(매들린 바르델·미국 시인 겸 번역가)
공동 작업은 두 사람의 끊임없는 대화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번역 과정에서 최 번역가와 시뿐 아니라 개인사 전반까지 소통한다는 김 시인은 2019 그리핀 상 수상 당시 "(최 번역가의) 번역에 손대지 않는다. 그의 질문에 대답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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