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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한겨울에 슬리퍼 차림... 거리의 아이들, 거리에서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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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한겨울에 슬리퍼 차림... 거리의 아이들, 거리에서 품는다

입력
2023.12.16 04:3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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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10년의 기록
동네 누비며 '위기청소년' 발굴해 도움
위축됐던 아이들, 어느새 마음문 '활짝'

지난달 30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봉림교 위에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작은별)가 주차돼 있다. 최현빈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봉림교 위에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작은별)가 주차돼 있다. 최현빈 기자

서봉기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팀장은 3년 전 지호(가명·당시 17)를 만났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호는 추운 날씨에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서울 강동구 성내동 '디스코팡팡' 앞에서 또래 2명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 팀장은 주저 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친구야, 안녕. 추운데 밥은 먹었니? 우리 '버스'에 한번 놀러 와!"

버스에서 논다고?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가 말한 버스는 쉼터가 10년째 운영하는, 일종의 움직이는 청소년 보호시설이다. '작은별'이란 애칭도 있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차 안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게임도 하고, 상담도 받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방황하는 10대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다. 기자도 지난달 30일 서울 신림동과 천호동을 담당하는 동남권 이동쉼터에 올라 '거리의 아이들'을 태워 봤다.

"방황하는 친구들, 우리 버스로 오세요"

영하 7도까지 떨어진 강추위에도 김범구 동남권 이동쉼터 소장과 직원들은 신림동 일대를 쏘다녔다. 위기 청소년을 직접 발굴하는, 이른바 '아웃리치' 활동이다. 신림동 전문가 김 소장은 "이렇게 추운 날엔 24시 셀프 빨래방이나 무인사진관에 애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

오후 8시쯤 직원들이 이동쉼터로 돌아와 보니 버스 안은 이미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외부는 파란색 밤하늘 배경에 별이 박힌 그림으로 치장돼 안정감을 줬고 휴대폰 충전기, 보드게임, 비디오 게임기가 비치돼 있었다. 책장엔 청소년 성장 문제를 다룬 책들이 빼곡했다. 게임장이자 도서관이고 상담소였다. 지호도 보였다. 그는 이동쉼터 단골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비행 청소년'이었다. 미성년자인데 흡연을 즐기고, 범죄에 연루된 전력도 있다. 하지만 버스 문턱을 넘으면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낙인찍지 않는다.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직원들이 지난달 30일 밤 신림동 일대에서 위기 청소년 발굴 활동(아웃리치)을 하고 있다. 최현빈 기자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직원들이 지난달 30일 밤 신림동 일대에서 위기 청소년 발굴 활동(아웃리치)을 하고 있다. 최현빈 기자

지호는 요즘 '인생 2막'을 꿈꾸는 중이다.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집 밖으로 내몰린 그에게 쉼터는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지호는 지금 물류센터와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구 재민(가명·19)이와 함께 살고 있다. 소파에서 쉬던 두 사람은 8,000원짜리 식권을 건네받고 버스를 나섰다. 그런 아이들 뒤에서 직원 정희원씨가 소리쳤다.

"밥 맛있게 먹고, 다음에도 꼭 와야 돼!"

지호의 사례는 거리 청소년의 일반적 모습이다. 버스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은 대개 부모에게서 신체·정서적 학대를 받아 위축돼 있다. 올 초 이동쉼터에 처음 들른 현수(가명·18)도 그랬다. 하지만 이날 만난 현수 얼굴에선 그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좋은 점수를 받은 성적표를 내보이며 자랑하고, 직원들과 수다를 떨었다.

쉼터 아이들을 지켜보며 '가출 청소년'이 어쩌면 잘못된 용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과 사회가 이들을 집 밖으로 밀어낸 것일 수도 있다. 9개월째 자원봉사를 하는 대학생 신명진(22)씨는 "십중팔구는 가정 불화에 시달려온 아이들"이라며 "만나 보면 사실 엄청 평범하다"고 말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고 시설이 싫은 아이들도 분명 있지만 정책적 실마리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리 아이들 원흉 가정학대... "얘기 들어주세요"

7일 찾은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내부. 비디오 게임기와 만화책, 소파 등이 구비돼 있다. 최현빈 기자

7일 찾은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내부. 비디오 게임기와 만화책, 소파 등이 구비돼 있다. 최현빈 기자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계속 늘고 있다. 이동쉼터(서울 동남권 기준)만 봐도 이용자가 2014년 3,000명에서 지난해 1만2,013명으로 4배나 급증했다. 올해 역시 지난달까지 1만1,944명이 버스를 다녀갔다. 높은 접근성과 기존 쉼터와 다른 무겁지 않은 분위기 덕에 위기 청소년이 쉽게 마음의 문을 연다고 한다. 김 소장은 "가정 밖 청소년 27%만 일반 쉼터에서 생활한다"면서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동쉼터는 때로 청년들의 '홀로서기'를 돕기도 한다. 직장인 이예진(가명·21)씨는 부모님과의 심각한 갈등 탓에 1년 전 무작정 집을 나왔다. 지낼 곳을 찾다가 상담사의 추천으로 이곳을 처음 찾은 뒤 틈날 때마다 위안을 얻으러 온다. 이씨는 "2, 3주에 한 번은 꼭 퇴근 후 선생님들을 보러 온다"며 "내년에는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싶은 꿈이 있다"고 웃어 보였다.

버스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내일도, 모레도 달릴 것이다. 다치고 와도 야단치지 않는다. 잘못을 해도 애써 타이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이 말 한마디면 족하다.

"○○야, 우리 따뜻한 겨울 보내자."

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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