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절제·암시로 빚은 간결하지만 풍부한 소설의 매력
수녀원에서 부당한 처우받은 소녀들을 만난 후
갈등하는 남성의 내면을 집요하게 그려낸 작품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55)은 25년간 딱 다섯 권의 책을 냈다. 과작인 데다 분량도 매우 짧다. 모두 합쳐도 700쪽. 불과 14만 개의 단어로 유럽은 물론 미국을 넘어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섰다. 키건 소설의 매력은 절제와 생략, 상징과 암시로 간결하나 풍부하다는 점이다. 암호를 풀 듯 적극적 독법을 자극하는 것도 매력이다. 국내에는 올해 처음 그의 소설이 소개됐다. 지난봄 '맡겨진 소녀'가 호평받은 데 이어 최근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도 출간됐다. 116쪽(원서 기준)의 이 소설은 오웰상(소설 부문) 수상작이자 역대 가장 짧은 부커상 최종 후보작으로 키건을 유럽 밖에 알린 결정적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나는 1985년 12월 아일랜드 도시 뉴로스다. 주인공 '빌 펄롱'은 석탄 배달로 아내(아일린)와 딸 다섯을 부양하는 책임감 강한 가장이다. 지역 조선소가 문을 닫고 비료 공장은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하는 혹독한 시기이지만 적어도 끼니 걱정은 없다. 스스로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펄롱은 그저 조용히 엎드려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지내는 안온한 삶을 지향한다. 그래야 딸들을 동네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세인트마거릿 학교) 졸업생으로 키울 수 있으니까.
지루할 정도로 안정된 이 삶에 파동을 일으킨 건 배달 간 수녀원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으니 수녀원 탈출을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소녀를 본 후 문을 걸어 잠그는 자물쇠와 유리 조각이 죽 박힌 높은 담벼락이 그제야 펄롱의 눈에 들어온다. 그냥 수녀원을 나왔지만 내내 마음이 쓰인다. 열여섯 살 미혼모의 아들이었던 터라 소녀를 잊기 힘들다. 하지만 수녀원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도시에서 소녀를 도우면 자신의 평범한 삶은 파괴될 게 자명하다. 작가는 "자기보호 본능"과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할 "용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펄롱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키건은 폭력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전작과 다른 건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아니라 가정을 둘러싼 사회와 국가 단위의 폭력으로 시선을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수녀원은 그 중심에 있다. 작가는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는 헌사로 소설을 시작하며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 모티브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18세기부터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정부와 함께 운영한 막달레나 세탁소는 재교육을 명목으로 미혼모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를 수용했지만 실상은 여성 약 3만 명을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킨 곳이었다. 1996년에야 문을 닫았고 2013년이 되어서야 정부가 사과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단순한 고발로 그치지 않아 한층 무게감 있다. 작가는 수녀원과 정부의 잘못을 책망하는 일보다는 흔들리는 펄롱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리는 것에 집중한다. 소녀를 돕는 순간에도 한편으로는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를 지켜보며 독자는 함께 갈등하고 긴장한다. 공동체의 잔인하리만큼 철저한 침묵이 폭력 체제를 지탱하는 현실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다. 작가는 펄롱을 통해 신랄한 질문을 퍼붓는다. 펄롱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안온한 현실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가. 박차고 나가기로 한 당신의 용기는 모두에게 선(善)일 수 있는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펄롱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처럼 용기를 낸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아니다. 작가가 그의 용기를 "순진한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용기가 산산히 부서질 미래를 암시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떠올리게 하는 현대적 크리스마스 소설이라 칭하는 건 가족 바깥에서도 사랑과 베풂이 전달될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있어서다. 도움을 받아본 적 있는 펄롱은 그것을 또 다른 이에게 전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2022년 부커상 후보자 인터뷰 당시 작가는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으니 두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행간에 숨은 의미를 연결해가는 재미가 있다. 도시 풍경을 소묘한 대목들은 뒷이야기를 알고 보면 그 속에서 새로운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기사
[가만한 당신] 철조망 너머, 막달레나 세탁소의 진실(2022년 10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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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01315310004852?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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