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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왕복 1시간… 인분아파트는 '용변권'을 무시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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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왕복 1시간… 인분아파트는 '용변권'을 무시한 결과

입력
2023.11.16 04:30
수정
2023.11.1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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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마루시공 현장의 화장실 고충]
300~400명 인부에 컨테이너 화장실 서너 개
생리 하면 출근 못해… 현장에서 처리하기도
작업량 따라 임금 받는 '가짜 사업자' 계약 탓

마루 노동자 A씨가 지난해 10월 마루를 깔기 전 준비 작업을 하는 모습. 분진에 뒤덮여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A씨 제공

마루 노동자 A씨가 지난해 10월 마루를 깔기 전 준비 작업을 하는 모습. 분진에 뒤덮여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A씨 제공

"전국 신축 아파트에서 인분이 발견된다는데 왜 그런 건가요?"(기자의 물음)

"안 싸고 버틸 수가 없어요. 우리도 사람인데 오죽하면 그러겠어요."(건설노동자의 답)

이달 8일 경기 북부의 고층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만난 20년 차 마루 시공 근로자 A씨가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될 공간에 변을 보는 게 정상적인 일이 아니란 걸 잘 안다.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하지만 최근까지도 두세 개층에 한 층에서 (인분을) 목격했어요."

최근 입주자 카페 등을 보면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서 오물, 음식물 쓰레기, 분변이 발견됐다는 목격담이 잇따른다. '인분 아파트' 혹은 '벌레 아파트'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건설업계는 애써 외면하려는 문제다. 시공을 담당한 어느 건설사는 "음해 세력의 소행으로 보인다"며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발견된 인분은 현장 노동자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건설사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현장 근로자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만 몰아가기는 쉽지 않다. 만성적으로 현장에 화장실이 부족한 데다, 공사기일에 쫓겨 화장실이 있는 1층까지 다녀올 시간조차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현장 노동자들은 입을 모은다.

300~400명 인부가 참여하는 아파트 10개 동 공사 현장에 설치된 화장실용 컨테이너는 서너 개가 전부다. 공사 후반기에 주로 투입되는 타일공 B씨는 "간이 엘리베이터만 설치되는 경우, 한 번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1시간이 걸린다"며 "아예 (화장실에) 갈 수 없는 환경"이라고 토로했다.

8일 방문한 경기 북부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현장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고 시간도 없어 마루 시공자들은 보통 현장에서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떼운다. 장수현 기자

8일 방문한 경기 북부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현장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고 시간도 없어 마루 시공자들은 보통 현장에서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떼운다. 장수현 기자

'용변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모든 공정 단계에 투입되는 건설 노동자들이 함께 처한 문제지만, A씨 같은 마루 시공자들은 가장 마지막에 공사에 투입되기에 특히나 시간에 더 쫓긴다. A씨는 "이번 공사도 입주일이 얼마 안 남아 급하다"며 "아무리 빨리 다녀와도 30분이 넘는데 그럼 일이 밀린다"고 토로했다.

그들도 나름의 노력은 하고 있다. 화장실에 덜 가려면 밥도 적게 먹고 물도 조금 마셔야 한다. 이날 12시간 일한 A씨의 식사도 점심에 먹은 컵라면 한 개가 다였다. '배가 고프진 않냐'는 질문에 "너무 힘들면 집에서 가져온 믹스커피나 과자를 먹는다"고 답했다.

여성 마루 시공자들의 처지는 더 열악하다. 소수이다보니 화장실은 컨테이너 1개가 전부다. 배변을 참다가 방광염이나 변비에 자주 걸린다. 생리를 할 땐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부득이하게 출근했다면 현장에서 뒤처리를 할 때도 있다. 공사장에서 만난 6년 차 마루 시공자 C씨는 "못 내려가니까 기둥 뒤에 서서 생리대를 간 적도 있다"며 "생리를 하지 않는 나이가 되니 화장실 덜 가서 좋다는 생각부터 들어 서글펐다"고 전했다.

문제의 근원: 근로자처럼 일하는 사업자

대구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균열(왼쪽)과 이를 마루 본드로 임시 처리한 모습. 권리찾기유니온 제공

대구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균열(왼쪽)과 이를 마루 본드로 임시 처리한 모습. 권리찾기유니온 제공

'1시간이 걸려서라도 화장실에 다녀오면 되지 않냐'는 지청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이들도 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건 마루 시공자들이 형식상으론 근로자가 아니라 사업자라는 이유도 있다. 임금을 노동 시간이 아닌 작업량에 따라 받는다. 경력 5년 차든, 20년 차든 임금은 평당 1만 원 내외. 시공자 둘이서 10시간에 25평형 집 1개를 시공하고 틈새 면적까지 빼면 받는 건 최저시급 수준이다. 주말과 공휴일 없이 일하는 이유다. C씨는 "주 52시간에서 최대 69시간까지 늘린단 얘기도 나왔던데 우린 이미 그렇게 일하고 있었다"고 헛웃음을 지었다.

정해진 기간에 주어진 양만큼 일하는데 사업자로 계약되는 건, 기업이 노동관계법 적용이나 사회보험 등 비용 부담을 피하려고 꼼수를 부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타일공들도 종종 가짜 사업자 계약을 강요받는다. 시공사마다 이들을 대하는 처우도 제각각. B씨는 "똑같은 일을 해도 공사 현장 20%에선 사업자로, 80%에선 근로자로 계약을 맺고 일해왔다"고 현실을 전했다.

용변권조차 보장 못 받는 불안정한 지위는 아파트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장 마지막 공정에 해당하는 마루 시공 단계에서 다른 공정의 하자를 덮으라는 부당한 지시를 받아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항의하지 못한다. 실내 배관 공정에서 불량이 생겨 벽 밖으로 나온 배관을 실리콘으로 가리라거나, 시멘트 바닥에 생긴 균열에 보수제 대신 마루 본드를 바르라는 식이다. 최우영 권리찾기유니온 마루지부장은 "부실을 발견해서 알려도 듣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만약 공사라도 중단되면 '사업자'라 임금 보전도 안 된다"며 "보호받을 법이 있어야 하자도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근로자성(인적·경제적 종속관계 등)을 가지는 공사장 일에는 근로자 지위를 정당하게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소속 권호현 변호사는 "회사가 마루 시공자를 고용보험에 가입시켰는데도, 지방노동청이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결정이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며 "고용노동부가 나서야 할 때"라고 짚었다.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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