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주목받은 영화 '빅슬립'은 구원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진지한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낸 연출의 강약조절과 생동감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낸다. 여느 블록버스터가 부럽지 않은, 작지만 강력한 영화의 탄생이다.
'빅슬립'은 서울 외곽에서 혼자 외롭게 사는 30대 남자 기영(김영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집 앞 평상에서 잠을 청하는 10대 소년 길호(최준우)를 발견한 그는 갈 곳이 없는 길호에게 자신의 집 한켠을 내어준다. 예상 밖의 호의에 의아함을 품는 길호에게 기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응한다. 그저 하룻밤을 재워주려던 것뿐인데, 기영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길호의 속 사정을 알고 보호막을 자처한다.
길호는 거칠고 투박한 기영을 통해 가족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들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관계는 어그러지고 만다. 기영과 길호는 서로에게 크게 실망하고 상실감을 느낀다.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는 쓸쓸한 두 영혼이 갈등을 봉합하고 치유해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연출을 맡은 김태훈 감독은 청소년을 위한 예술강사로 일하던 당시의 경험과 고민을 작품에 녹였다. 가정폭력의 아픔을 겪고 집에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던 제자에 대한 기억이 '빅슬립'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작품을 통해서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는 김 감독은 제작비가 부족해 사비는 물론 주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힘겹게 영화를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악착같은 생동감이 묻어난다. 거칠지만 따뜻한, 한마디로 오묘한 매력이 있다. 어둠을 헤매는 두 영혼의 마음에 볕이 드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표현돼 깊은 울림을 준다. 미처 관심 갖지 못했던 (어쩌면 알고서도 외면했을) 비행 청소년들의 현주소를 짚어주며 어른들에게 쓰라린 반성을 안겨주는 것 또한 이 작품이 가진 힘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김영성),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 오로라미디어상을 수상한 비결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무수한 칭찬이 쏟아지자 감독은 모든 공을 배우들에게 돌렸다. 그는 역할에 꼭 맞는 배우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수천 명의 배우들을 만났고 지금의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희열을 느꼈단다.
작품의 중심에 있는 김영성과 최준우는 나이를 뛰어넘은 환상적 연기 호흡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김영성은 크고 작은 많은 작품들에 참여해 현장의 경험을 쌓았고, 이 작품을 통해 연기 내공을 폭발시켜 영화인들을 놀라게 했다. 촬영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최준우 역시 남다른 에너지를 발산하며 배우로서의 높은 가능성을 입증했다. 두 배우는 시나리오 속 인물을 고스란히 현실로 옮겨놓은 듯한 날것의 연기로 '보는 재미'를 준다. 이랑서와 현우석 김한울 등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이 탁월한 연기력으로 몰입도를 높였다.
그야말로 인간관계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다. 각종 SNS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이 넘쳐나고, 그 어느 때보다 관계성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진짜 내 영혼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될까. 진심은 유려한 말로 대체될 수 없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한 형태로 우리네 삶에 침투할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번 느껴보기를. '빅슬립'은 오는 22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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