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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치 역사와 '상식'이 외면하는 어두운 진실

입력
2023.10.2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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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비드쿤 크비슬링

2차대전 나치 치하의 노르웨이 총리를 지낸 크비슬링(왼쪽). 그는 독일이 침공하기 전부터 최소 2차례 자신의 롤모델이던 히틀러를 만난 친나치주의자였다. snl.no

2차대전 나치 치하의 노르웨이 총리를 지낸 크비슬링(왼쪽). 그는 독일이 침공하기 전부터 최소 2차례 자신의 롤모델이던 히틀러를 만난 친나치주의자였다. snl.no

상식은 2차대전 전과 후의 나치를 편의적으로 동일시하지만, 당대 세계인의 인식에서 둘은 판이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나치식 경례를 하는 사진이 유명하지만 국왕 에드워드 8세 등 왕실 유력자 상당수가 전쟁 전까지 친(親)나치였던 건 비밀도 아니다. 미국서는 ‘독일계 미국인 분트’가 결성돼 전국 70여 곳에 지부를 두고 수만 명이 활동했다. 그들은 ‘독일의 미덕’을 찬양하고 ‘유대인의 음모’를 비난하는 집회와 시위를 잇달아 열고, 보이스카우트처럼 나치 청년단을 꾸려 교육했고, 나치 깃발을 들고 주요 도시를 수시로 행진했다. 한마디로 나치의 부상을 독일인(만)의 집단 최면 결과로 치부하는 것은 진실의 왜곡이거나 선택적 망각일 뿐이며, 히틀러의 세계 지배 망상이 당시 서구 사회의 저 열광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아예 망언은 아닐 것이다.

나치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정당 집단이 된 배경에는 1929년 대공황이 있었다. 나치의 민족사회주의, 반유대-반공산주의는 우익민족주의와 좌익사회주의를 폭넓게 포섭하며 대공황의 비참에 희망을 안겼다. 거기다 인종주의, 즉 현실의 고통이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듯 자본주의 모순이란 복잡하고 추상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확실한 적의 음모 때문이라는 단순 명쾌한 주장도 대중을 사로잡는 데 유효했다. 그 힘의 정점에 카리스마의 지도자가 있었다.

노르웨이 군인 출신 정치인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 1887.7.18~1945.10.24)도 골수 나치 추종자였다. 군사학교를 최우등 졸업하고 국방장관(1931~33)까지 지낸 그는 나치당을 본뜬 일인 독재 민족정당 ‘국민연합’을 창당, 40년 독일 침공 후 승승장구하며 42년부터 만 3년 노르웨이 총리를 지냈다. 자신을 퓌러(Führer, 총통)라 부르게 했던 그는 전후 반역죄로 총살형을 당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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