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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거’ 주윤발 “인생 공수래공수거… 하루 흰쌀밥 두 그릇이면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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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거’ 주윤발 “인생 공수래공수거… 하루 흰쌀밥 두 그릇이면 충분”

입력
2023.10.05 16:19
수정
2023.10.05 16:44
23면
0 0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인상 수상
"대표작 영웅본색 와호장룡 첩혈쌍웅
영화 안 되면 마라톤 선수로 전업할 것"

저우룬파는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검열 등 여러 규제 때문에 홍콩 영화가 예전만 못하나 노력해서 홍콩 정신을 보여주고 싶다”며 “창작의 자유가 한국 영화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부산=연합뉴스

저우룬파는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검열 등 여러 규제 때문에 홍콩 영화가 예전만 못하나 노력해서 홍콩 정신을 보여주고 싶다”며 “창작의 자유가 한국 영화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부산=연합뉴스

‘따거(중국어로 큰형님)’는 따거였다. 홍콩 배우 저우룬파(周潤發ㆍ주윤발)는 따거라는 별명에 걸맞게 연륜 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줬다. 5일 낮 부산 해운대구 문화공간 KNN시어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였다. 그는 4일 오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영화인상은 아시아 영화 발전에 공헌한 영화인에게 부산영화제가 수여하는 공로상이다. 저우룬파는 1980년대 홍콩 영화 황금기를 이끈 최고 스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등장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의 저우룬파는 정면과 좌우를 향해 각각 한 번씩 허리를 숙였다. 그는 “중국에서 인생은 2번의 갑자(甲子)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두 번째 갑자에 들어서 이제야 일곱 살이다(67세라는 의미)”라며 “그러니 잘 부탁드린다”며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저우룬파는 1976년 데뷔했다. 방송국 연기 교육반에 들어간 때는 1973년이다. 연기 인생 반백년을 맞은 셈이다. 그는 “부산영화제에서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며 “(연기 시작) 50년 만에 이런 상을 받아 매우 신난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인터넷에서는 저우룬파가 투병 끝에 죽었다는 출처 불명 뉴스가 나돌았다. 거짓으로 확인됐으나 그의 오랜 팬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일이었다. 저우룬파는 “(스타에 대한 헛소문은) 매일 있는 일이라 저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다음 달 3일 홍콩에서 열리는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라 어제 오늘 아침 러닝을 했고 내일도 연습으로 10㎞를 뛸 것”이라며 건강을 과시했다. 저우룬파는 “(다음 달 한국에서 개봉하는 신작) ‘원 모어 찬스’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배우에서 마라톤 선수로 전업할 생각”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저우룬파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는 등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다. 1조 원 가까운 재산 대부분을 기부해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저는 돈을 벌어다 주고 용돈을 받아 쓰는 사람”이라며 “기부는 제가 아닌 아내가 한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태어날 때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으니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며 재물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저는 하루 흰쌀밥 두 그릇이면 충분합니다. 요즘은 당뇨 때문에 하루 한 그릇만 먹을 때도 있지만요.”

저우룬파는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들과 함께 셀카를 찍고 싶다"며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그는 촬영 후 기자들과 온라인으로 사진을 공유했다. 저우룬파 제공

저우룬파는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들과 함께 셀카를 찍고 싶다"며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그는 촬영 후 기자들과 온라인으로 사진을 공유했다. 저우룬파 제공

50년 가까이 활동하며 출연한 영화만 100편가량이다. 홍콩을 넘어 할리우드 카메라 앞에도 섰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가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냥개비를 씹던 ‘영웅본색’(1986)이 가장 사랑받는다. 저우룬파에게도 ‘영웅본색’은 특별하다. “방송국을 (완전히) 떠난 후 만난 첫 영화라 (제 이력에) 영향이 컸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표작 3편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영웅본색'과 ‘첩혈쌍웅’(1988), ‘와호장룡’(2000)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저우룬파는 “한국인 같아서 한국 팬들이 많은 것 같다”고 우스개를 던졌다. 그는 “1980년대 한국에서 촬영할 때 매일 갈비탕에 김치 넣어서 먹고 번데기를 즐겼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기도 했다.

40년 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거액을 기부한 남다른 인생을 살고 있으나 저우룬파는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홍콩 작은 바다마을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도시로 나갔고 공부를 많이 못했다”고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영화가 저에게 많은 지식을 가져다줬습니다. 여러 역할을 하며 다양한 인생을 경함하고 인생 도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산=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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